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는 마루에 앉아 밤새 하얗게 쏟아진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에서 으레 들리는 날짐승, 들징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소복이 쌓인 눈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차단한 듯했다. 어둠마저도 눈에 가로막혀 그가 기거하는 석궁에는 발을 들이지 못했다. 내려앉은 눈송이들은 석궁을 둘러싼 채 반짝이고 있었다. 탈해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손을 올려둔 채 새하얀 눈을 보았다.
날은 추웠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허공을 물들이다 사라졌다 산을 타고 올라온 찬 기운이 그의 몸에 이르렀지만, 그래도 그는 다시 침소에 들 생각이 없었다. 밤새 그에게 어리광을 부르며 오라버니와 함께 새해 첫해를 보겠다던 색동은 잠이 든 지 오래였다. 그런 색동을 방에 누이고 그 역시 잠자리에 들려 했던 것이 축시 무렵이었다.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으나 도무지 잠이란 녀석은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다.몇 번을 뒤척여 보기도 했으나 쉽게 잠들 수 없었다. 그 상태로 잠 못 든 채, 인시에 이르렀다.
탈해는 숨을 내뱉었다. 깊은 한숨이었다. 피어오른 김이 사라지고 또다시 숨을 토하길 반복했다. 두 손은 다리 위에 명상하듯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멀찍이 보이는 산자락을 훑고 있었다. 몸은 이곳에 있으나 마음은 이미 저곳으로 날아간 것 같았다. 하아…. 고요한 궁에 그의 한숨 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그때였다.
“땅 꺼지겠소.”
고요한 적막을 깨고 들려온 목소리에 탈해는 손을 꼭 쥐었다. 정돈되어 있던 바지춤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저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쾌한 웃음을 지은 채 나타난 그는 눈에 반사된 빛 때문인지 평소보다도 더 화색을 띠고 있었다.
“어인 일이십니까?”
“그대가 그리 세상이 꺼질 듯 숨을 내쉬는데 내 어찌 편히 잠들 수 있겠소?”
듣기 좋은 말만을 골라 하는 통에 탈해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혹 간사한 꾀를 부리는 뱀은 아닌가 생각했다. 허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속된 것들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아니었다. 탈해는 주먹을 꼭 쥔 채로 입을 열었다.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그대도 마찬가지지 않소.”
용이 나타날 시간은 아닐 텐데. 그의 답에 탈해는 입을 다물었다.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하는 손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며 탈해는 그의 눈을 마주했다. 보랏빛 눈동자는 맑디맑아 탈해의 모습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탈해의 시선에 빙그레 웃어 보이는 얼굴에서 여유까지 묻어났기에 그는 조용히 눈을 돌렸다.
진휘는 단 한 번도 그의 앞에서 빈틈을 보인 적이 없었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그럴 만도 한데, 오히려 그가 의도한 대로 넘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같은 하늘을 나는 동물이라 할지라도 진휘와 탈해는 급이 다른 동물이었다. 용은 흔히 세상을 다스리는 기개를 지닌 위인들을 나타내며 인간으로부터 떠받들어지는 위대한 존재였다. 그에 비해 까치는 기껏해야 서민들을 상징하며, 반가운 소식을 가져다준다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비교되는 존재다. 자신은 절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날 때부터 가진 존재. 탈해는 진휘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는 없었지만, 그는 진휘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러한 것이 분했다.그렇기에 그를 대하는 것이 껄끄러웠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접근하는 그를 반길 마음은 없었다. 처음엔 그저 십이신장의 생활에 싫증이 나 잠시 재밋거리로 자신을 대한다 생각했다. 그래서 잠시뿐일 진휘의 여흥에 어울려준 것이 전부였다.
진휘는 탈해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털썩 주저앉은 채 탈해와 같은 방향을 응시했다. 주변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고요가 깃든 산속이었지만, 옆에 있는 자의 존재로 인해 진휘는 쓸쓸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다만 당장에라도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 버릴 듯한 그가 위태로워 보여 걱정할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오?”
잠들지 못한 원인이 된 남자가 그리 물어오니 탈해는 답답했다. 아마 진휘는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리라.그렇게 생각했다. 진휘가 매일 같이 그를 찾아온 지도 오래된 일이었다. 꽃이 피고 짐에 따라 계절이 바뀌었다. 그래도 그를 대하는 진휘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봄바람이 마음을 간질이고 태양이 그를 향해 열을 발할 때도, 바람이 그를 쓸쓸히 만들고 추위가 그를 움츠리게 만들 때도 진휘는 변하지 않고 그의 곁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가 일상에 녹아들었다. 색동의 꼬까옷을 사러 갔던 때에도, 벚꽃이 흩날리는 날 벚나무에 기대어 술 한잔을 마시던 날도, 인간에 비해 터무니없이 길다 생각했던 무의미한 삶이 그로 물들어갔다. 사는 것에 낙이라고는 커가는 색동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던 그에게 진휘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자신의 세계에 진휘라는 남자가 얼마나 발을 들여놓았는지 모르진 않았다. 그렇기에 더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면 자신만이 그에게 휘둘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탈해는 어느새 파고든 한기에 얼어붙은 손을 쥐었다.
진휘는 그런 그를 놓치지 않았다. 손을 뻗어 한기가 맴도는 그의 손을 덥석 감싸 쥐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을 확인한 진휘는 조심스레 탈해의 손을 쓰다듬었다. 곱다. 참으로 곱다. 눈보다도 흰 손등을 쓸어내리며 진휘는 다정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무얼 하시는 겝니까?”
“그대 손이 찬 것 같아 좀 덥힐까 싶어 그만.”
탈해를 보는 그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저 그대가 좋아 하는 행동이니 석연치 말게. 그리 말하는 눈빛에 탈해는 제 얼굴에 더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그가 나타나면 휘둘릴 뿐이었다.오늘 잠들지 못한 것만 해도…. 색동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탈해는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오라버니,얼굴이 많이 밝아졌어요.’ 저조차도 모르고 있던 변화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그 한마디로 인해 그는 확실히 자각했다. 매일 같이 얼굴을 마주하던 진휘가 그저 십이신장 중 진이 아닌 다른 의미로 제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사내 둘이 남사스럽습니다.”
탈해는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허나 진휘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빠져나가려는 그의 손을 더 꼭 쥐었다. 묘하게 입꼬리를 올린 진휘는 남자와 입 맞출 듯 얼굴을 가까이하며 물었다.
“싫은 게요?”
“…….”
탈해는 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마음은 그를 향하고 있음을.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마냥 반가워할 수도 없었다. 왕과 같은 지위를 가진 그와 탈해의 차이는 컸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다른 십이신장들 역시 탈해를 경계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조금, 조금 정도는 더 생각할 시간을…. 진휘는 더 묻지 않았고, 가만히 그의 곁에 앉아 따듯한 제 손으로 탈해의 손을 어루만졌다. 차갑던 손끝이 진휘의 온기로 인해 녹아갔다. 밤새 쌓인 눈 역시 조금씩 녹아가고 있었다. 멀리 산 끝자락에 날아가는 새 한 쌍이 보였다. 봄이 오고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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