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기타

밀리언아서 진휘탈해 '잠 못 드는 밤'

중독된 깡 2014. 5. 13. 10:29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이었다그는 마루에 앉아 밤새 하얗게 쏟아진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자연에서 으레 들리는 날짐승들징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소복이 쌓인 눈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차단한 듯했다어둠마저도 눈에 가로막혀 그가 기거하는 석궁에는 발을 들이지 못했다내려앉은 눈송이들은 석궁을 둘러싼 채 반짝이고 있었다탈해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손을 올려둔 채 새하얀 눈을 보았다.

날은 추웠다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허공을 물들이다 사라졌다 산을 타고 올라온 찬 기운이 그의 몸에 이르렀지만그래도 그는 다시 침소에 들 생각이 없었다밤새 그에게 어리광을 부르며 오라버니와 함께 새해 첫해를 보겠다던 색동은 잠이 든 지 오래였다그런 색동을 방에 누이고 그 역시 잠자리에 들려 했던 것이 축시 무렵이었다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으나 도무지 잠이란 녀석은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다.몇 번을 뒤척여 보기도 했으나 쉽게 잠들 수 없었다그 상태로 잠 못 든 채인시에 이르렀다.

 

탈해는 숨을 내뱉었다깊은 한숨이었다피어오른 김이 사라지고 또다시 숨을 토하길 반복했다두 손은 다리 위에 명상하듯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그의 눈은 멀찍이 보이는 산자락을 훑고 있었다몸은 이곳에 있으나 마음은 이미 저곳으로 날아간 것 같았다하아고요한 궁에 그의 한숨 소리만이 크게 울렸다그때였다.

 

땅 꺼지겠소.”

 

고요한 적막을 깨고 들려온 목소리에 탈해는 손을 꼭 쥐었다정돈되어 있던 바지춤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저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호쾌한 웃음을 지은 채 나타난 그는 눈에 반사된 빛 때문인지 평소보다도 더 화색을 띠고 있었다.

 

어인 일이십니까?”

그대가 그리 세상이 꺼질 듯 숨을 내쉬는데 내 어찌 편히 잠들 수 있겠소?”

 

듣기 좋은 말만을 골라 하는 통에 탈해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혹 간사한 꾀를 부리는 뱀은 아닌가 생각했다허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속된 것들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아니었다탈해는 주먹을 꼭 쥔 채로 입을 열었다.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그대도 마찬가지지 않소.”

 

용이 나타날 시간은 아닐 텐데그의 답에 탈해는 입을 다물었다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하는 손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며 탈해는 그의 눈을 마주했다보랏빛 눈동자는 맑디맑아 탈해의 모습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탈해의 시선에 빙그레 웃어 보이는 얼굴에서 여유까지 묻어났기에 그는 조용히 눈을 돌렸다.

 

진휘는 단 한 번도 그의 앞에서 빈틈을 보인 적이 없었다계속해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그럴 만도 한데오히려 그가 의도한 대로 넘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같은 하늘을 나는 동물이라 할지라도 진휘와 탈해는 급이 다른 동물이었다용은 흔히 세상을 다스리는 기개를 지닌 위인들을 나타내며 인간으로부터 떠받들어지는 위대한 존재였다그에 비해 까치는 기껏해야 서민들을 상징하며반가운 소식을 가져다준다는 이야기가 전부였다비교되는 존재다자신은 절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날 때부터 가진 존재탈해는 진휘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는 없었지만그는 진휘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러한 것이 분했다.그렇기에 그를 대하는 것이 껄끄러웠다그렇기에 자신에게 접근하는 그를 반길 마음은 없었다처음엔 그저 십이신장의 생활에 싫증이 나 잠시 재밋거리로 자신을 대한다 생각했다그래서 잠시뿐일 진휘의 여흥에 어울려준 것이 전부였다.

 

진휘는 탈해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털썩 주저앉은 채 탈해와 같은 방향을 응시했다주변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고요가 깃든 산속이었지만옆에 있는 자의 존재로 인해 진휘는 쓸쓸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다만 당장에라도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 버릴 듯한 그가 위태로워 보여 걱정할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오?”

 

잠들지 못한 원인이 된 남자가 그리 물어오니 탈해는 답답했다아마 진휘는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리라.그렇게 생각했다진휘가 매일 같이 그를 찾아온 지도 오래된 일이었다꽃이 피고 짐에 따라 계절이 바뀌었다그래도 그를 대하는 진휘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봄바람이 마음을 간질이고 태양이 그를 향해 열을 발할 때도바람이 그를 쓸쓸히 만들고 추위가 그를 움츠리게 만들 때도 진휘는 변하지 않고 그의 곁에 있었다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가 일상에 녹아들었다색동의 꼬까옷을 사러 갔던 때에도벚꽃이 흩날리는 날 벚나무에 기대어 술 한잔을 마시던 날도인간에 비해 터무니없이 길다 생각했던 무의미한 삶이 그로 물들어갔다사는 것에 낙이라고는 커가는 색동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던 그에게 진휘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자신의 세계에 진휘라는 남자가 얼마나 발을 들여놓았는지 모르진 않았다그렇기에 더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그의 웃는 얼굴을 보면 자신만이 그에게 휘둘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탈해는 어느새 파고든 한기에 얼어붙은 손을 쥐었다.

 

진휘는 그런 그를 놓치지 않았다손을 뻗어 한기가 맴도는 그의 손을 덥석 감싸 쥐었다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을 확인한 진휘는 조심스레 탈해의 손을 쓰다듬었다곱다참으로 곱다눈보다도 흰 손등을 쓸어내리며 진휘는 다정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무얼 하시는 겝니까?”

그대 손이 찬 것 같아 좀 덥힐까 싶어 그만.”

 

탈해를 보는 그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그저 그대가 좋아 하는 행동이니 석연치 말게그리 말하는 눈빛에 탈해는 제 얼굴에 더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언제나 그가 나타나면 휘둘릴 뿐이었다.오늘 잠들지 못한 것만 해도색동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탈해는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오라버니,얼굴이 많이 밝아졌어요.’ 저조차도 모르고 있던 변화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그 한마디로 인해 그는 확실히 자각했다매일 같이 얼굴을 마주하던 진휘가 그저 십이신장 중 진이 아닌 다른 의미로 제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사내 둘이 남사스럽습니다.”

 

탈해는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허나 진휘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오히려 빠져나가려는 그의 손을 더 꼭 쥐었다묘하게 입꼬리를 올린 진휘는 남자와 입 맞출 듯 얼굴을 가까이하며 물었다.

 

싫은 게요?”

…….”

 

탈해는 답하지 않은 채고개를 돌렸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이미 마음은 그를 향하고 있음을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마냥 반가워할 수도 없었다왕과 같은 지위를 가진 그와 탈해의 차이는 컸다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다른 십이신장들 역시 탈해를 경계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조금조금 정도는 더 생각할 시간을진휘는 더 묻지 않았고가만히 그의 곁에 앉아 따듯한 제 손으로 탈해의 손을 어루만졌다차갑던 손끝이 진휘의 온기로 인해 녹아갔다밤새 쌓인 눈 역시 조금씩 녹아가고 있었다멀리 산 끝자락에 날아가는 새 한 쌍이 보였다봄이 오고 있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