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 놓은 창 틈새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맥주캔에는 어느새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번쩍이는 TV 화면에서는 이번 주에 보자고 마음먹었던 영화가 한창 흘러나왔었지만, 악평이 심했던 만큼이나 더럽게나 재미없는 이야기에 더 눈길이 가지 않아 꺼버린 지 오래였다. 할 일은 더 없지만, 곧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니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선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졸리지도 않았고, 잠을 자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이 상태로 누워봤자 잠들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수백 번의 밤을 보낸 후 알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할 만큼 중대한 사건ㆍ사고가 발생한 건 아니었지만, 오늘도 몇 번인가 출동 전화를 받았다. 아침 일찍부터 소방서 주변을 청소하며 동네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가스 불 사용에 놀란 아이들을 달래기도 하고, 위험에 빠진 길고양이를 구출하기도 했다. 일이 없을 때는 하품을 하며 내무반 바닥에 뻗어 있기도 했고, 선배에게 점심을 얻어먹으며 자식 자랑을 듣기도 했다.
한마디로 업무에 충실했던 하루였다. 그렇기에 몸은 어서 빨리 휴식을 취하라며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정신은 잠자리에 들기를 거부했다. 차게 식은 바람이 어쩐지 휑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닫기 위해 베란다로 다가섰는데, 오랜만에 올려다보는 하늘에 별이 몇 개 떠 있었다. 비가 온 후라 그런지 여기서도 맑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몇 개가 보였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다시금 들이치는 바람에 서둘러 창문을 닫고 자리로 돌아왔다.
테이블에 놓인 빈 캔만 7개. 저녁을 먹은 후, 만들어 두었던 안주는 이미 동난 상태였고, 먹다 남은 캔이 하나였다.
‘돼지 새끼. 배 안 터졌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두리번거렸으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배는 이미 포만감에 가득 차 있었지만 정신만은 너무나 멀쩡해서 술을 마셨다는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혼자니까 조금 정도는 긴장을 풀어도 될 텐데.
‘또냐. 술 마실 때 정도는 긴장 풀라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앞에서 그러냐? 술맛 떨어지게.’
들었던 말이 생각나 볼을 꼬집었을 때, 비로소 얼얼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은 취했나. 마냥 아프지만은 않은 느낌에 TV를 보자 새까만 화면에 비친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환히 켜져 있던 불을 끄고 거실에 깔아둔 이불 위로 엎어졌다. 후아. 깊은숨을 내쉬자 맥주에 물든 술 냄새가 진하게 느껴졌다. 제법 취했나. 이거 마시고 취할 정도는 아닌데. 걸음걸이도 정상이었고 정신도 제법 멀쩡한 편이었다. 약간 알딸딸한 정도. 이대로 잠이 들면 좋을 텐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으나 여전히 잠들 수 없었다.
기분 탓인가. 아까 떠올린 말로 안 좋은 생각이 불쑥불쑥 치솟는 걸 참은 탓일까. 그렇다면 토해내고 나면 잠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으로 들어갔다.
침실로 들어가 드레스룸 문을 열자, 옷장 가득히 걸려 있는 옷이 보였다. 농구할 때 입었던 가벼운 운동복부터, 많이 놀러 다니자며 샀던 등산복, 집에 있을 때 자주 입었던 옷에, 특별한 날에만 입었던 내가 처음으로 선물했던 옷까지. 몇 년이 지나도 정리할 수 없었던 옷장만이 그대로였다.
이미 집안의 물건도 변한 지 오래였다. 근무 일정을 나타내던 알림판은 벽에서 떼어낸 지 꽤 됐고, 책장에 있던 그라비아 잡지류는 전부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선반에 놓인 자주 쓰는 식기류는 예전처럼 항상 2개씩 준비되어 있었지만, 이젠 내 것이 아닌 그릇과 수저로도 곧잘 밥을 먹곤 했다. 바구니에 쌓인 옷가지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세탁기를 돌려도 될 정도로 양이 적었고, 집안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없으니 정리 역시 수월해져 집안일에 할애하는 시간이 전보다 줄어들었다.
여유 시간이 늘어났으나, 특별히 다른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가 있었던 듯, 없었던 듯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언제나처럼 같은 생활을 반복했다. 가끔 그리움에 사무쳐 울기도 했지만, 울고 나면 감정과 그만큼의 체력이 소모되어 더 힘이 빠지곤 했다. 그리고 울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현실이 더 뼈아프게 사무칠 뿐이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주변의 반응도 그랬다. 세이린의 모두는 물론이고 키세나 미도리마, 무라사키바라마저도 나를 걱정했다. 직장 선배의 동거인마저 나를 걱정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귀에 딱지가 생길 만큼 들은 말이었는데, 실제로 현실도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울기를 그만두었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졌다. 어찌 보면 살아나가는 데 쓸데없는 감정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것들이었기에 나는 쉽게 슬픔을 놓아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고,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느낌이 남아 있었지만 차차 나아졌다. 그렇게 익숙해진 탓일까. 이제는 말끔히 정리된 경찰제복을 봐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집안 곳곳에 여전히 그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그 어떤 것을 보아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울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울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옷장문을 닫고 나왔다. 이젠 잘 수 있을 것 같아 침대에 누웠다. 그와 함께일 때는 항상 비좁다고 느껴졌던 침대가 지금은 너무나도 컸다. 장을 치르고 일주일 후, 대청소를 했었다. 사용했던 물건이 남아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던 때가 있었기에 강행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고스란히 전부 제자리에 돌아왔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고개를 들어 방을 살피자, 남겨둔 그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뒤집어두고 싶었지만, 현실과 마주하자는 의미로 애써 세워두었던 사진이었다. 톡, 톡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sleep_k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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