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는 들떠 있었다. 왕자님이 행차한다는 소식에 사람이 몰렸다. 왕권계승자의 행차는 이와토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긴 했지만, 그와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소스케 왕자는 사냥 후, 귀환할 때마다 그날 잡은 사냥감의 가죽이며 이빨 등 전리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준다 했다. 그래서인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이 떼로 몰려 있었다. 여자들은 조금 다른 이유였다. 소스케님이 그렇게 멋있다며? 나 저번에 왕자님이랑 눈 마주쳤다구! 왕권 다툼에 연연하지 않으나 이미 다음 왕위계승자로 확실시되는 왕자님. 거기에 오랜 시간 남부와의 전쟁에서 사메즈카를 승리로 이끈 것은 전부 소스케 왕자 덕분이라고 노인들이 입을 모았다. 조금만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이면 정보가 쏟아지는 곳, 그곳이 길이었다.
혼담이 오가는 상대에게 흥미가 동한 것은 물론이요, 수군대는 민중들 사이에서 왕자에 대한 악의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기에 마코토는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과연,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기에….’
곳곳에 숨어 있는 용병들이 눈에 선했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아직 통성명도 하지 못한 결혼상대를 보기 위해 왔을 뿐, 다른 뜻은 없었다. 그럼에도 호위를 대동한 것은 길거리에 왕자님을 홀로 내보낼 수는 없다는 하루카와 나기사 그리고 성에서 그의 빈자리를 대신해 일하고 있을 레이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큰일을 하는 건 아니잖아. 지켜보는 것뿐이고.’
사람은 사람 속에만 숨을 수 있다. 오래전부터 성 밖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보내 온 마코토였다. 햇볕이 쨍쨍하니 뒤집어 쓴 모자 속이 오히려 시원했다. 이런 뙤약볕에도 군중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사메즈카에서 이와토비의 평판은 그럭저럭 좋았다. 소스케 왕자와의 혼담이 오가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상인들 사이에 두 나라 왕실의 신뢰가 두터운 덕이었다. 먹고살 수 있게 교역을 터준 것이 민중에게는 가장 환영할 일이었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보다도 먼저 들린 것이 민중의 환호성이었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시작된 함성은 사람들의 발소리보다도 더 크게 그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피어오르는 흙먼지에 잠시 입을 가렸다. 뿌옇게 변한 시야 너머로 마차 가득히 실린 짐승들이 보였다. 칼로 벤 멧돼지부터 시작해 활에 맞은 꿩, 토끼, 사슴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쌓여 있었다. 마차를 보고 민중들이 탐욕스런 눈을 빛내기 시작할 때, 왕자가 나타났다.
와아아아아아!!! 쏟아지는 함성 속에 마코토는 모자를 벗었다. 갈색의 커다란 말에 탄 왕자의 옷차림은 일개 사냥꾼과 다를 바 없었다. 왕족으로 보일 만한 장신구는 푸른 사파이어 귀걸이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단번에 그가 왕자라는 사실을 알아본 것은 남다른 외모와 더불어 느껴지는 기운 때문이었다. 멧돼지 가죽을 높이 들어 보이는 팔에는 잔 흉터가 선명했다. 전장에서 무엇을 보고 겪었을지는 바보라도 짐작 할 수 있었다.
시끄러운 길 한복판에서 마코토는 그곳에 자신과 그만이 있는 광경을 보았다. 아우성이 멎고 모든 소리가 사라진 가운데 두 사람만이 서 있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 속에서 결코 스쳐 지나갈 수 없는 사람이기에 본능적으로 느꼈다. 설사 본다 해도 수많은 사람에 묻혀 지나갈 게 분명한데도 불안감과 동시에 기대가 몰려왔다. 계속 보고 있다간 눈을 마주칠지도 몰라. 강인한 인상과 거칠게 민중을 선동하는 손짓을 주시했다. 옆에 있어야 할 사람. 저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 그는 손을 가슴에 댔다. 무엇이 이토록 온몸이 떨리게 하는지.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었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더 이상 쳐다보면 안 돼. 고개를 돌려야 하는데. 그래도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길을 내주며 모여든 군중에 왕자는 웃고 있었다. 너희들에게 주기 위해 특별히 많이 잡아 왔다는 말은 굳이 내뱉지 않아도 마차에 실린 전리품이 대신해 주었다. 살갗을 태우는 더위에도 모여든 백성들. 그들이 제게 전하고픈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소스케는 있는 힘껏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시선이 느껴졌다. 소리치는 민중은 그를 어지럽게 만들었지만, 자연스레 눈은 갈 곳을 찾았다. 모자를 벗어 빼꼼히 얼굴만 내민 남자를 보고 그의 시간도 멈춰 버렸다.
잘못 본 건가. 갈색 머리에 초록 눈동자는 흔하다. 흔할 텐데. 그럼에도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본 것은 그 역시 지나가던 행인에게서 무언가를 감지한 탓이었다. 말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나 소스케의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두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자신만을 가득히 담은 그 눈동자에 소스케의 몸이 떨렸다. 기시감. 하지만 어디서?
초상화란 것은 거의 진실을 담지만 모든 게 사기일 가능성도 크다. 각국에서 사메즈카의 번영에 빌붙기 위해 보내온 초상화에는 절세미인들이 가득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빼어난 미모와 실력을 갖춘 자들만을 뽑았다는 초상화 중에서 눈이 가는 것이 있었다. 눈꼬리를 휘며 활짝 웃는 얼굴에 예쁘장하다며 넘기려다 이와토비의 왕자라는 니토리의 말에 다시 초상화를 봤었다.
이와토비의 왕자가 길거리에 서 있다? 의문을 품을 것도 없다. 그럴 리가 없지. 헛게 다 보이나. 하지만 감았던 눈을 떴을 때도 그 자리에 선 남자가 보였다. 그는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왕자를 보고 있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시선을 느끼고는 이내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웠다.
‘민중의 호응에 웃음으로 화답하는 것이 왕실에 속한 자의 의무니라.’
아버지의 말씀에 소스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깜빡이는 찰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눈을 감아도 알 수 있는 존재감. 적어도 길거리에 서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왕자는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여전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이름 모를 행인을 향해 웃었다.
***
침대에 앉은 그는 허리춤의 칼을 내려놨다. 사냥이 나흘이었으니 며칠 만에 눕는 침대는 더없이 편안했다. 비록 왕실 침대에 비할 만한 커다란 방과 부드러운 감촉은 아니었지만, 편안히 몸을 누일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전쟁이 한창일 때,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서 들끓는 벌레들을 상대하며 지새웠던 밤에 비하면 사치나 다름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동네에 못 보던 녀석이 있던데.”
“마을 사람들 얼굴도 외우고 다니셨어요, 왕자님?”
대단한 눈썰미라며 감탄하는 모모타로였지만 곧 린에게 딱밤을 맞았다. 린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왕자의 사냥은 사메즈카에선 공연히 알리는 일정이다. 어떤 녀석이 소스케를 노리고 온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어떤 녀석?”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인 남자.”
“…널린 외모잖아.”
“니토리가 가져왔던 이와토비 왕자 초상화랑 비슷했어. 모모, 알아 와.”
소스케의 손짓에 모모타로는 경례를 하고 물러났다. 린은 왕자의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불만스런 표정. 쏟아질 말이 무언지 알기에 소스케는 침대에 몸을 누였다.
“신경 쓰는 건 알겠는데, 빠르게 결정할 건 없잖아. 물론 이와토비 왕자랑 혼인하는 게 최적의 상황이긴 하지만.”
“알아. 그러니까 확인해 보려는 거야.”
소스케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오래된 친우의 걱정은 알고 있다. 그래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허름한 나무판자 지붕을 올려다보며 그는 허공에 선택지를 그렸다.
“왕자라면 아무도 모르게 사메즈카까지 와서 날 보려고 한 이유가 뭔지 궁금하고. 아니라면 그 정도 미인을 이 마을에 남겨 뒀었다는 게 아까우니 하룻밤 즐겨 볼까. 뭐, 그런 거지.”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제일 고민하고 있을 사람은 누가 뭐래도 소스케 자신임을 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남 일처럼 구는 건 좀 그렇잖아? 얄미운 녀석. 린은 모모에게 했던 것처럼 왕자에게 딱밤을 날렸다.
“…몸조심하란 말이야. 너한테 일이 생기면 독박은 내가 쓰는 거니까. 뭐 내다 놔도 안 죽을 것 같긴 하다만.”
“그거 칭찬이야?”
에서 끝나는 배포본이었습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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