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수영

Free! 전력 60분 소스마코 포스트잇

중독된 깡 2016. 5. 8. 23:00








흔한 연애도 못 해보고 이번 봄도 이렇게 지나간다며 모모가 우는 시늉을 했다. 시험 준비하는 녀석이 할 말이냐. 풀 죽은 채 땅을 보고 한숨을 내쉰 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녀석은 벌떡 일어났다. 위로할 필요가 없다. 녀석의 머리 한구석에는 언제나 긍정으로 돌아가는 배터리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곧 여름! 여름방학! 바다! 축제! 이벤트!"

불끈 쥔 주먹과 투구벌레를 본 것처럼 반짝이는 눈에 패기까지 실려 있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서관 옆 쉼터는 점심을 먹고 한숨 돌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들어간다.”

“아, 선배애! 조금만 더 놀다 가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봄? 연애 한 번 못해 보고 지나가게 되는 계절에 무슨 의미가 있지. 그전에 빨리 경찰이 되는 게 우선이라고. 졸업까지 여유가 있는 후배랑 보내는 시간도 아까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큰 문제가 요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


…또냐. 뜻하지 않게 찾아온 봄기운이라고 할까 뭐라고 할까. 어김없이 자리에 놓인 포스트잇을 보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칸막이 책상 너머로 이동하는 사람이 몇 명, 자리에 앉아 책을 보는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 빼꼼히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을 보며 나는 기출문제 위에 붙은 쪽지를 뗐다.

-오늘도 힘내세요.

한두 번으로 끝난 응원이었다면 선배든 후배든 뭐 나 잘되라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는 거니까 기쁘게 넘어갔을 텐데. 이 포스트잇은 벌써 필통 안에 20장 넘게 쌓여 가고 있었다. 범인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학교 도서실이고 감시카메라든 주변인이든 조금만 조사하면 누군지는 쉽게 알 수 있으니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는데. 요즘은 하루에 한 번씩 쪽지를 받고 있었다.

내용은 늘 같았다.

-힘내세요.

-늘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아요.

-응원하고 있어요.

-드시고 하세요.

포스트잇과 함께 음료수 한 캔이나 간식거리가 놓여 있었다. 단 건 원체 좋아하지 않지만, 책상 앞에만 앉아 있다 보면 머리를 돌리기 위해서라도 당분이 필요한 게 사실이라 주는 걸 그대로 받아먹었다. 음료수나 음식에 뭘 탔나. 이거 먹고 죽는 건 아니겠지. 공부하느라 아르바이트 하나 못 하고 용돈을 타 쓰는 처지도 있고 공짜로 주는 걸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곧잘 먹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무서워졌다. 대체 왜? 누가? 뭘 위해서?

이런 문제로 괜한 골머리를 앓을 필요 없단 생각에 감시카메라를 확인했다. 3층 2번 열람실 117번 자리 23일 2시부터 3시 사이 좀 볼 수 있을까요? 구체적인 질문에 아저씨는 도난 사건인 줄 알고 흔쾌히 보여주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자 하나가 포스트잇과 캔 음료를 두고 가는 걸 똑똑히 봤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가 맨 가방만으로도 누군지 짐작이 갔다.

도서관 죽돌이들은 흔히 같은 자리를 고집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늘 가던 자리가 편하고 시험시즌마다 괜히 공부 좀 해보겠다고 열람실에 달려드는 철새 같은 족속들이 제일 짜증 났다. 인생을 걸다시피 공부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자리를 갈취당하는 느낌이기에 늘 새벽같이 일어나 열람실 자리를 확보하는 게 큰일이었다. 

평소에는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구석 자리. 그 자리를 선호하는 사람은 몇 명 있고 대부분 나 같은 부류다. 말 한 번 나눠 보지 않았어도 며칠만 있어 보면 감이 온다. 하루 이틀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다들 영어, 법, 경제, 세계사 등등 각자 분야에 필요한 책들을 갖고 있으니 지나가다 자리에 놓인 책 몇 권만 보면 ‘저 사람, 무슨 시험 준비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자리도 거의 옮기지 않다 보니 그 부근에 모인 6~7명 정도의 사람은 저절로 인상착의를 파악하게 된다.

타치바나는 그중 한 명이었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타치바나는 내 자리에서 세 칸 떨어진 옆에 있었다. 나보다 밖과 가까운 자리. 열람실에 드나들 때마다 나는 그가 있는 자리를 지나야 하니 내가 자리를 비우면 그는 바로 알 수 있었겠지. 굳이 점심이 아니더라도 잠깐 사물함에 가거나 화장실에 가는 등의 틈이 있으니 쪽지를 남기는 시간도 매번 다르고.

면식은 있었다. 지난 학기부터 시험에 도움이 될 만한 수업들을 찾다가 공무원법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번 학기에는 세계사와 경제를 같이 듣고 있어서 강의실에서도 몇 번 마주쳤었다. 앞에서 두세 번째 줄에 내가 앉으면 그는 늘 거기서 몇 줄 떨어져 앉았다. 학기 초엔 의식하지 못했지만, 여름이 다가오는 지금은 확실히 느낀다.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 봄부터 시작된 포스트잇 때문에 조사하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


이해가 안 되네. 자리에 놓여 있던 음료를 들고 휴게실로 빠져나왔다. 조용한 열람실과 달리 휴게실은 떠들썩했다. 탄산음료를 따 입에 댔다. 맛은 언제나 같다. 다를 것 없는 시중에서 파는 음료수다. 대체 왜 챙겨 주는 건데? 이번 학기 강의에서 나 모르게 비밀 마니또라도 진행했나?

카메라만으로는 확신이 없어 니토리에게 부탁해 봐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가장 포스트잇을 자주 남기는 시간은 역시 자리를 오래 비우는 식사시간 때였다. 열람실에서 나오는 척 지갑을 빼 들고 빠져나온 다음, 니토리에게 근처에 가 살펴보라고 했다.

-그 사람 맞아요. 121번자리.

휴게실 쇼파에 앉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해가 되는 건 아니다. 먹을 거 사다 주면 나야 땡큐지. 그래도 조금 무섭잖아. 강의가 겹치는 것도 그렇고 늘 옆에 있으니 서로 알 거 다 알아도 내색 없이 지내는 사인데. 시험을 준비하는 건 같지만 각자 목표하는 바는 다를 수도 있고 분야가 겹치면 오히려 라이벌이라는 의식까지 불타는 마당에. 우리 시험 열심히 해 봐요 같은 건가? 그럼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한테 포스트잇이나 먹을 거 주는 건 한 번도 못 봤는데?

혹시 게이야? 그래서 다가오고 싶은데 시험에 방해될까 봐 말은 못 걸겠고. 커밍아웃할 용기도 없고. 그런 건가? 확실히. 타치바나는 발표 같은 데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질문을 하면 가산점을 주겠다는 교수의 말에도 손 한 번 드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 가끔 교수가 질문을 던지는 강의에서는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더듬 대답했던 모습이 기억에 있었다. 그런 면에선 어수룩한 사람이었다.

열람실에 오는 시간은 내가 들어온 후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뭐 그야 이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 시간쯤에 오니까.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하고 마음먹은 사람이 아닌 이상 그렇게 딱딱 맞춰 오긴 힘들지. 금요일에는 공강인지 자리를 비우는 일이 드물었고,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수업을 듣는 듯했다. 책 볼 때는 안경을 끼고, 소리 없이 잔 움직임이 많았다. 혼자 밥 먹을 때는 학식, 친구들이 있을 때는 밖으로 나가는데 매점에서 간단히 처리하는 것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퇴실은 도서관 폐관에 맞춰서. 

이거 왠지 점점 내가 더 스토커 같지 않아?! 

내가 신경 쓰여서라도 호의는 거절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현장을 덮치지 않는 이상, 발뺌할지도 모르니까. 니토리한테 다시 부탁해서 잡아야겠어. 그쪽이 챙겨 주는 건 고마운데 챙겨 줄 이유는 없는 거라고. 왜 이러는 건지 이유나 들어 보자고 하면 되나. 아무 이유 없이 잘해 주는 건 그 속에 무슨 의도가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 제일 무서운 건데. 

근데 진짜 좋아서 이렇게 하는 거면? 그냥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고 하면? 헬렐레 웃는 얼굴이 생각났다.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거 같아. 그럼 괜히 나만 오버한 게 되는 건가? 고작 강의 몇 번 같이 들은 사람을 익명으로 이렇게까지 챙겨 주는 게 이상한 거 아냐? 

애초에 왜 내가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어야 돼? 그 인간은 자리에서 공부나 하고 있을 게 뻔한데. 누구한테 고민이랍시고 늘어나 봤자 해결될 일도 없잖아. 괜히 나만 이상한 사람 되는 것 같고.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와서 하든가!

빈 캔을 구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도 뭐도 아닌 거잖아. 그냥 아는 사람이니까. 말해서 어색해진다고 해서 나쁠 것 없지. 저 자리가 좋긴 하지만 정 틀어지면 열람실을 옮기면 그만이고. 쓰레기통에 아무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 시끄러운 휴게실에서 캔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래. 별거 아니니까. 그냥 저지르고 끝내지.


***


열람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121번에는 예상대로 그가 앉아 있었다. 고민하지 마. 이런 걸로 머리 쓸 시간 없어. 나는 경찰이 될 거라고. 자리로 돌아가는 척, 걸어가 그의 뒤에 섰다. 책의 글자 위를 지나가던 손가락이 멈췄다. 힐끗 옆으로 돌아가던 고개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래. 117번으로 가지 않았으니까. 지금 당신을 보고 있다고. 타치바나 씨.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손을 들었다. 턱 하니 어깨에 손을 놓고 나는 최대한의 친절한 미소를 담아 웃었다.

“잠깐 저 좀 볼까요?”





뒷 얘기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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