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쳤다…. 문을 닫으며 자연스레 현관 앞에 주저앉았다. 집안은 텅텅 빈 채로 나가기 전 급하게 벗어던져 둔 옷가지와 수건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반겨 줄 사람이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 허공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빨랫감을 주워다 통에 담았다. 하루가 보면 분명 잔소리할 텐데. 그전에 하루가 있었으면 집이 이 모양은 아니었겠지. 며칠째 정리는커녕 청소조차 하지 않아 설거짓거리며, 먼지가 잔뜩 쌓인 게 눈에 들어왔다.
개키지도 않은 이불 위로 풀썩 쓰러지자 먼지가 풀풀 날렸다. 옷을 벗을 기운도 없었다. 이번 알바 자리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문제가 생긴 건지. 오후 내내 하는 편의점 알바는 꽤 즐거웠다. 물건이 들어오는 시간도 있고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처리해야 하는 재고품들은 고스란히 알바생의 몫이라 가끔 덤을 받는 기분으로 일했다.
이전 알바처에서는 사장을 잘못 만나 호되기 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꽤 신중히 정한 알바였다. 그렇다고 해도 거의 하루가 도와줬던 거였지만. 신고당하기 싫으면 내일까지 알바비를 입금해 달라는 하루의 말에 사장은 화를 냈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통장 내역에는 밀렸던 두 달 치 월급이 들어와 있었다. 굉장해, 하루. 내가 몇 번을 말해도 들어주질 않았는데…. 하루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 마코토, 너는 사람이 너무 좋아.
만만하게 보였다는 말일까…? 쉽게 보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다음 알바처는 일하기 전에 상의해서 정하라는 하루의 말에 집에서 가깝고 시급이 괜찮은 알바를 골라 가져갔다. 손님 접대도 좋지만 귀찮은 사람이 꼬이면 곤란하니까. 하루는 그렇게 말하면서 몇 군데를 집어줬고 그중 방학 알바가 급하게 필요했던 편의점에서 바로 일하게 됐다.
그런데 왜 여기서까지 사람 문제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축 처진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더 무기력해질 것 같았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벗었다. 풀풀 날리는 먼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불도 환히 켜고 일단은 부엌으로 갔다. 쌓인 그릇들을 치우지 않으면 식사를 할 수 없으니까. 입술을 꽉 깨물고 세재 통을 눌렀다. 수세미를 비비자 하얀 거품이 부글부글 피어났다.
새벽 알바인 켄타 씨가 아침 시간대의 마나미 씨에게 관심을 보였다. 사람 마음이 어떻게 될지야 모르는 거니까 호감 정도야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지만, 최근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겨받을 때 마나미 씨는 조금 곤란한 듯이 웃었었다.
‘타치바나, 마나미 씨한테 내 얘기 좀 잘 부탁한다고.’
그런 말까지 들었는데, 정작 마나미 씨는 그럴 맘이 없어 보였다.
-졸업 준비하면서 알바하느라 바쁜데….
외면으로 평가해선 안 되지만, 가끔 마주치게 되는 켄타 씨의 친구들은 조금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빈말이라도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흰 그릇을 벅벅 수세미로 문질렀다. 깨끗해진 것 같은데 손끝에 만져지는 굳은 음식물의 감촉에 다시 수세미질을 했다.
-안 떼어지면 나중에 하면 되니까. 놔둬.
하루의 말에 이전에 들었던 조언이 생각났다. 알바를 시작할 무렵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다가 나온 말이었다.
-뭔가 그 두 사람 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될 걸 예상이라도 했던 걸까. 중간에 끼게 되면 곤란해지는 건 나라는 걸 하루는 잘 알고 있었다. 대회를 위해 하루가 출국하고 나서 켄타 씨는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지. 마나미 씨는 좋게 거절해 보고 정 안 되면 사장님께라도 말해 보려는 듯했다.
설거지를 마친 후에 앞치마에 슥슥 물기를 닦았다. 늘 하루가 도와 주는 터라 익숙지 않은 일투성이였다. 곱게 개어 있던 걸레를 집어 물을 적셨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렸다. 작지만 걸레질을 할 때면 늘 원래 크기보다도 배는 커 보이는 집이었다. 부디 일이 더 커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켄타 씨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말은 통하는 사람이니까. 혹시 마나미 상이 더 곤란해지면 내가 나서야 하는 상황도 오는 걸까?
-너는 걱정이 너무 많아.
고개를 내젓는 하루의 표정을 상상해 버렸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청소를 마치고 욕실에 들어갔다.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아까까지 했던 알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그래. 하루 말대로 걱정이 너무 많아. 좋은 일만 생각해도 모자란 하루인데 말야. 몸을 움츠려 입까지 담그고 나니 욕실 곳곳이 눈에 들어왔다. 양치 통에는 보란 듯이 파란색 칫솔이 꽂혀 있었다. 하루 이제 곧 시합이겠지. 선수권대회니까 기록은 내지 않아도 되지만 올림픽을 기다리면서 겸하는 대회니까 기록이 나쁘면 아무래도 부담은 갈 거고.
-예선은 볼 필요 없으니까. 본선 시간. 일본에선 새벽일 거고 굳이 보지 않아도 돼.
그 말 뒤에 이어진 하루의 눈빛은 ‘날 못 믿어?’였기에 괜히 두근거렸던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애인 시합 정도는 당연히 보고 싶은 거잖아. 대회 전에 적응한다면서 거의 한 달 정도 못 보게 된 거고. 이렇게 오래 못 보게 된 것도 오랜만이고. 그 전에도 겨우 만나서 안고 싶었는데 하루 훈련에 지장 갈까 봐 손도 못 대고. 아아, 못 참겠다! 하루 오면 꽉 안아 줄 거야. 다음 연습이고 뭐고 왕창 안아 줄 거니까! 마음속의 혼잣말이 부끄러워 그대로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하루의 모습은 선명했다. 뜨거운 물 때문에 화끈거림을 느끼며 나는 오래도록 욕탕에 앉아 있었다.
***
하루, 미안! 테이블 위 하루의 사진에 두 손을 모았다. 그치만 요새 여유도 없어서 하루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데다가 혼자 할 시간도 없었고 갑자기 하루 생각하니까 전에 했던 것도 생각나고 그…. 다시 달아오를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내저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넣어뒀던 생수를 병째로 꺼내 마셨다. 찬물이 꿀꺽꿀꺽 넘어가는 소리에 조금은 진정이 됐다. 달력에 적어둔 대회 시간이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 목욕 너무 오래 했나 봐.
급히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켰다. 인터넷 창을 기다리는 동안 알바처에서 가져온 음식들을 꺼냈다. 도시락에 가라아게랑 삼각김밥. 그리고 맥주까지. 하루 경기니까 제정신으로 봐야 하지만. 하루가 참가하는 경기니까 더 제정신으로 못 볼 것 같단 말야. 로딩이 끝나자마자 나는 캔을 땄다. 톡 하는 소리와 함께 찬물이 지나간 길을 맥주가 훑고 지나갔다. 씻겨 내려가는 느낌에 입가를 훔치고 화면을 봤다. 레일별로 선수가 소개되고 정신없이 장면이 휙휙 바뀌었지만, 하루와 하루의 이야기 외에는 귀에 들어오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어떡해. 너무 떨리는데.
선수들이 출발대 위에 섰다. 아, 이제 봤는데 옆에 라이벌도 있잖아. 하루, 경쟁자가 있으면 기록이 더 잘 나오는 편이니까. 한 손에는 삼각김밥, 한 손에는 맥주 캔을 쥔 채 나는 조용히 화면에 집중했다. 순간 조용해지며 온 레일을 비추는 화면에 침을 꿀꺽 삼켰다.
탕 하는 총소리와 함께 선수들이 뛰어들었고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도저히 못 보겠어. 그치만 봐야 해! 눈을 감은 채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하도 급하게 마신 터라 속부터 싸한 데다 중계자들이 말하는 소리가 급하게 들려 왔다. 실눈을 뜨고 본 화면에는 앞으로 치고 나온 선수 서너 명이 보였다. 짧은 영어지만 몇 마디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스트로크가 빨랐구나. 5번은 플라잉이었나 봐. 아깝네. 하, 하루는 잘했던 건가. 7번 레일에서 앞을 향해 팔을 내젓는 하루를 보며 나는 손에 쥐었던 것들을 전부 내려놨다. 그리고 자연스레 두 손을 모았다. 하루, 하루…! 이기게 해 주세요. 그동안 하루 나랑 만나는 시간도, 쉬는 날도 없이 엄청나게 노력했으니까…!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는데, 뒤이어 커다란 함성에 눈을 떴다. 들어오는 순간은 보지 못했지만, 밑에 뜨는 시간으로 하루의 순위를 볼 수 있었다. 금메달은 미국의 다른 선수가 가져갔지만, 7번 레일의 나나세 선수도 공식적으로는 개인 최고기록을 냈다는 해설이 이어졌다.
그렇네. 하루 기록에서 몇 초 더 당겨 졌어. 모았던 두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갈 데를 모르고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뒤늦게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 하루!! 하루 축하해!! 엄청나잖아! 세계에서도 하루의 수영은 통하는 거라구. 하루 오면 크게 축하해 주고 싶은데. 뭐, 뭘 해 줘야 할까. 뭔가 선물 같은 거 준비해야 할까?
잔뜩 들떠 있는 동안 시상식으로 바뀐 화면이 보였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방송만 보고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하루의 얼굴에 집중했다. 금메달의 미국 선수 인터뷰가 끝난 후, 하루에게 카메라가 돌아갔다. 개인 신기록을 낸 감상을 묻는 질문에 하루는 더듬더듬 영어로 답했다.
-1등 할 각오로 왔는데 아쉽네요. 하지만 개인기록도 갱신했고 기분 좋습니다. 다음에는 꼭 애인한테 금메달을 선물해 주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하… 하루우…! 옆에 있던 돌고래 인형을 와락 끌어안았다. 하, 하루 멋있어. 귀여워! 계속해서 이어지는 소리 없는 비명이 하루한테까지 들리진 않을까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욕심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하루니까. 계속 수영을 해서 다행이야. 다음 올림픽 때는 정말 금메달 따 버리는 거 아냐?! 돌고래 인형을 안고 이불 위를 뒹굴거리던 나는 조용히 노트북을 덮었다.
돌고래 인형을 전등 아래에 번쩍 들었다. 있잖아, 하루. 축하해. 고요한 방 안에 내 목소리가 울렸다. 혼자 있는 집은 조금 쓸쓸하니까.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 그리고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하루 돌아오면 안고 칭찬해 줄 거야. 부족한 분만큼 더 꽉 안고 안 놔 줄 거니까.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너무 멋있었다고 전부 말해 줘야지. 조금 전까지 분명 켄타 씨 때문에 고민했던 것 같은데. 하루의 일 앞에서는 전부 다 별것 아닌 일이구나. 내 안에 하루가 너무나 커다란 존재라서. 아, 지금 당장 보고 싶다. 하루 만지고 키스하고 싶어.
- 마코토, 자?
부드러운 돌고래 얼굴에 볼을 비비며 뽀뽀를 퍼붓고 있을 때였다. 휴대폰에 뜬 메시지에 나는 단번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가는 동안 좀 더 멋진 말을 준비하려 머리를 굴렸지만, 한마디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하루, 하루가 너무 좋아. 너무 좋아서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글썽이는 눈물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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