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배구

하이큐 전력 60분 쿠로다이 벚꽃

중독된 깡 2015. 3. 28. 22:02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했는데, 낮은 따듯했다. 평일 오후, 강변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점심 무렵에는 잠시나마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잠깐의 휴식이 끝난 사람들이 일터로 돌아가 버리자, 강변은 눈에 띄게 한산해졌다. 강을 따라 쭉 늘어선 나무에는 벚꽃이 만발해 있었다. 어쩌다 바람이라도 불면 연분홍의 꽃잎이 아무도 없는 길에 흩날리는 그 풍경은 장관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러한 풍경에도 감흥이 없는 건 순전히 내 마음 탓이었다. 대학교 3학년. 빠른 친구들은 벌써 인턴으로 사회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대다수 친구들은 휴학을 택했다. 유학을 간 사람도 있고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편입을 준비하는 학생도 있었다. 자격증이니 국가고시를 택하는 사람들도 더럿 있는데, 정작 나는 뭘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집에서 보내 주는 학비나 용돈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벌어 보는 게 좋을 것 같단 판단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었다. 패스트푸드점이며 아이스크림 창고 등 별 아르바이트를 다 해봤지만 말 그대로 노동과 경험에 불과했지 무언가 마음에 와 닿는 일은 없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전공을 살려서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데. 하고 싶은 거 해.’ 선배에게 그런 조언도 들었지만 전공을 떠나서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한다면 지금 배구 선수가 돼 있어야겠지. 이미 옛적에 떠나 버린 버스를 이제 와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또 좋아하는 걸 일로 하면서까지 날 괴롭히고 싶진 않았다.

옆에 앉은 쿠로오는 멍하니 자리에 앉아 앞을 보고 있었다. 다 마셨는지 손에 쥔 캔이 꾸깃꾸깃 구겨져 있었다. ‘벚꽃 구경 갈래?’ 그렇게 제안한 건 쿠로오였는데, 속이 뻔히 보여서 거절할 수도 없었다. 최근에 너무 징징거렸던가. 뭘 해야 할지 찾는 것부터 막막하단 내 이야기를 쿠로오는 몇 번 들어 주었다. 만날 때마다 취업을 앞두고 고민하는 내 모습에 신경을 써준 게 분명했다.

그러나 벚꽃을 즐기는 것도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거지. 당장 눈앞이 막막한 상태에서는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도 한겨울의 칼바람처럼 차게만 느껴졌다.

난 내가 스무 살이 됐을 때 참 많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손에 쥔 커피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벚꽃을 보던 쿠로오는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마주치는 시선에 나는 엷게 웃었다.

근데 아니더라. 수험 때도 대학교만 가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끝은 무슨. 그게 시작이었지.”

끝은 죽을 때나 돼서야 오는 거지.”

씩 입꼬리를 올리는 얼굴에 앞을 봤다. 나는 지금 쿠로오처럼 웃을 수 없었다. 찰랑이는 강물은 떨어진 벚꽃잎을 삼킨 채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고만 있었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열심히 했던 배구도,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 조금 했었어요로 끝나는 얘기인 거잖아. 어른이 돼서 한다고 해도 주말마다 아침 일찍 나와서 운동하는 아저씨들 조기축구회 같은 거나 다름없고. 너처럼 현역이 아닌 다음에야.”

에이, 왜 그러실까 사와무라 씨. 이렇게 날도 좋은데.”

쿠로오는 내 눈앞에 손가락을 튕기며 내 시선을 끌었다. 돌연 불어온 바람에 옆에 있던 나무에서 벚꽃이 떨어졌다.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폈다. 무수히 흩날리는 꽃잎들이 손 위로 떨어질 만도 한데. 막상 손에 떨어진 건 딱 하나의 벚꽃잎이었다.

벚꽃도 예쁘게 피지만 한때잖아. 결국엔 지고. 그러니까 이제 그런 생각도 들더라. 취업으로 고민하는 것도 회사에 들어가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달리는 거지만 그건 또 다른 사회생활의 시작인 거잖아. 계속 무언가를 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거고. 직장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나도 회사 가기 싫다’, ‘퇴근시켜 주세요를 입에 달고 살 거 아냐. 어떤 일은 하든 간에.”

사회생활이라는 건 아르바이트를 통해서도 겪었지만, 대학교에서도 충분히 겪을 수 있었다. 학번순으로 선후배가 갈리는 거야 당연한 이야기지만 같은 학생 사이에서도 군기를 잡는다는 둥 예의를 넘어선 관계를 강요하는 건 넌더리가 났다. 꼭 선후배가 아니라 동기 중에도 정상적인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스무 살이 넘고 대학생이 되어 겪었던 끔찍한 인간관계들을 사회에 나가서 또 겪어야 하는데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주변 선배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 실제로 겪으면 정말 때려치우고 싶어지겠지. 사람은 결국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나 다름없는데. 살기 위한 필수 요소로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건가. 그렇게 살아서 뭘 하고 싶은 건데. 하고 싶은 것도 굳이 없는데 여기 있을 필요가 있는 건가.

입을 다문 시간이 길어지자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쿠로오한테 이런 것까지 말하기는 조금 그렇고.

내가 열심히 해도 사람들이 다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없고. 하하.”

말하면서도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이 한심해 웃음이 났다.

정 취업이 안 되면 내가 고용할게. 나한테 장가드는 걸로.”

힐끗 눈을 돌리자 장난기 넘치는 얼굴이 보였다. 남이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쿠로오와 같이 사는 미래는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있었다. 동성 결혼 법안이 통과될 것 같다는 말도 있었고. 혼자서도 잘해 놓고 사는 쿠로오지만, 언젠간 결혼을 해야 할 테고 혹시 그 상대가 나라면 어떨까 하는 건 사귀기로 할 때부터 염두에 뒀다.

조용한 내 반응에 쿠로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그가 물었다.

사와무라. 우울해?”

.”

어떻게 해 줄까?”

위로하려는 게 분명한데도 아이처럼 조르는 것 같다.

…….”

한숨이 났다. 쿠로오에게 이야기한들 해결되는 건 없다. 쿠로오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 말하더라도. 단지 마음이 답답하고 말고의 차이일 뿐이다. 알고 있다. 어디 복권이라도 당첨돼거나 알지 못했던 돈 많은 친척이 나타난다거나 하는 터무니없는 일이 실현돼서 누구나 꿈꾸는 돈 많은 백수가 되지 않는 이상,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라는 걸.

그냥 가만있어.”

?”

내 말에 쿠로오는 기댔던 머리를 들었다.

부둥부둥이라든가 토닥토닥이라든가 뭐든 다 서비스해 줄 수 있는데. 뭣하면 지금 당장 침대로 가자고 해도 나는.”

가만있어.”

.”

조금이라도 기운이 나게 해 주려는 건 알겠는데. 농담을 받아줄 정도로 기분이 좋진 않았다. 화풀이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 할 텐데. 괜히 내가 우울하다고 연습하느라 피곤한 사람까지 힘들게 할 필요는 없고.

시무룩한 척, 기가 죽은 쿠로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꽃잎 하나가 여전히 올라가 있는 그 손에 쿠로오는 조용히 손을 겹쳤다. 테이핑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손은 상처와 부상으로 성한 데가 없었다. 너는 네 위치에서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나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고 싶어. 네 옆자리처럼 날 필요로 하는 그런 일 말야.

떨어지는 벚꽃처럼 한때라도 빛나면 좋겠는데. 나무 나이로 치면 아직 꽃봉오리도 맺기 전일 테니. 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단지 내가 하고 싶냐, 아니냐에 달린 문제니까. 아직 시간은 조금 더 있고. 고민하고 찾아가면 되니까. 성급하게 생각하진 말아야지.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바람이 불고 벚꽃이 흩날렸다. 떨어지는 벚꽃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말없이 쿠로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응원해 주는 사람도 옆에 있으니까. 나는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