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이 났다.
‘미안, 10분 정도 늦을 것 같아.’
휴대폰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싶었더니 출구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 10분째. 사람을 쳐다본다는 건 당사자는 모르게 남을 관찰한다는 느낌이라 좋아하지 않는데, 오늘은 누가 누굴 쳐다봐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갈 만큼 사람이 많았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거의 다가 옆 사람의 손을 잡거나 연인과 팔짱을 끼고 있었다. 더러는 허리나 엉덩이에 손을 얹은 채였다.
양쪽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웅성거리는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잔잔한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정신이 없이 그때그때 추가한 탓에 최근에 정리한 재생목록은 한 락밴드의 노래로 가득했는데 이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자기들 노래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척박한 세상에서 락을 노래하는 인디밴드의 음악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듯 사회 비판과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 얘기로 점철돼 있었다. 처음엔 무슨 헛소린가 하고 듣기만 했는데 인터넷으로 가사를 검색해 보고는 이들의 생각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때쯤이면…. 까맣게 변한 휴대폰의 버튼을 누르자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3월 14일. 그래, 이거구나. 지하철에서 편의점 앞을 지나올 때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편의점 알바생이 무슨 판촉을 하고 있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화이트데이. 발렌타인데이에 대한 보답으로 선물하는 날. 기원이야 어찌됐든 간에 21세기 사회에선 한낱 상술에 불과한데도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고 매번 기념일을 챙긴다. 이런 이벤트라도 없으면 일상이 너무 퍽퍽해지기 때문일까. 날짜를 생각하다 며칠 후에 빠져나갈 집세와 공과금, 관리비가 생각났다. 발렌타인데이도 화이트데이도 챙겨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부담만 되는 거 아닌가. 의례적으로 주는 거고 굳이 줄 필요도 없을 텐데.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 사탕 한 상자를 안고 지나갔다. 옆에 있는 여고생을 보니 아마 받은 것 같았다. 여학생을 보면서 시종일관 얼굴에 퍼진 웃음을 지울 줄 모르는 모습이 귀여웠다. 입 찢어지겠네. 그래도 저렇게 좋아할 때가 좋을 때지. 나도 모르게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흐뭇하게 웃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아, 방금 나 진짜 아저씨 같네. 나중이 되면 조건이니 뭐니 까다롭게 군다고. 부인한테 붙들려 꼼짝 못 하고 살고 있는 아사히를 생각하자 한숨이 났다. 얼굴 못 본 지도 오래됐네. 연락해 볼까.
허공을 보는 초점이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했다. 계속 한 방향만 보고 있으려니 출구 근처에서 서성이던 한 여자는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짧은 치마를 신경 쓰듯 옷매무새를 다듬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것만이면 그러려니 할 텐데, 기분 나쁘다는 듯한 여자의 표정이 거슬렸다. 당신 쳐다본 거 아니거든. 그냥 멍 때리고 있는 거라고.
보통은 자기가 의식하는 만큼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내 경우에는 전혀 아니었다.
첫 직장은 최악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친절하다고만 생각했던 직장 상사가 뒤로는 내 욕을 하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 거기에 시도 때도 없이 자기 일은 안 하고 이 일 했냐, 저 일 했냐 물어보는 직속 상사, 돌봐주는 척 내 얘기만 빼돌려 왜곡시켜서는 뒤에서 내 욕을 하고 다닌 팀원, 거기에 가장 윗선에서는 그런 쓸데없는 일을 벌이는 직원이어도 어차피 여기를 그만두면 갈 곳이 없는 사람이기에 묵인하고 오히려 관리자를 시켜 괴롭힘 당하는 쪽을 불러다 ‘네가 참아라, 쟤 불쌍한 애인 거 알잖아’라는 말까지 했다.
커피는 시럽이 들어간 종류만 마신다고 했더니 ‘사와무라 씨 나이가 몇인데’라며 비웃던 사람도 있었고, 가족같은 회사를 지향한다며 매년 기념일이 있는 주말마다 강제 소집을 하는 등 별별 일을 다 겪었다. 온갖 사회의 더러운 면은 다 보고 경험한 셈이었다.
당장 때려치고야 싶었지만, 도쿄에 온 후 바로 나가야 할 집세와 경력 없는 대졸자, 힘든 취업 등을 생각하면 섣불리 나올 수도 없어 이 악물고 버텼다. 뭐 덕분에 지금은 안정적인 데 다니고 있긴 하다. 그것도 사회초년생일 때 이야기라 지금은 무슨 일을 당하든 덤덤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생겼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생활에 지쳐가고 있단 점이다. 집-회사-집-회사를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직장인이 하는 일인데 그게 가끔 미칠듯이 힘들었다. 거기에 최근 문제를 더한 건 휴대폰 착신 이력에 부재중으로 찍힌 빨간 이름 탓이다. 어머니.
쿠로오와 사귄 지는 좀 오래됐다. 20대 후반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그 회사를 다니고 있을 시기에 ‘자긴 나보다 일이 좋잖아’란 말을 듣고 차여 술을 마시다 술기운에 말한 녀석의 고백을 받아들였다가 여기까지 왔다. 특별히 남자가 좋은 건 아니어도 쿠로오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직장도 더 좋은 데로 갔고 너도 얼른 결혼해야 하지 않겠냐’, ‘참한 아가씨 하나만 데려오면 될 텐데’ 하는 부모님의 푸념을 듣는 것도 날로 지쳐 갔다. 더군다나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도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는 게 내키지 않아, 지난 명절에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했다. 언제나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하는 일도 스스로 결정했었고 또 말씀만 드리면 부모님께서는 흔쾌히 동의해 주셨기에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넌 이제부터 자식도 아니다. 집에 오지 마라.’
자식을 어찌 그리 험하게 다루시는지. 격노한 아버지는 당장에 주먹을 날리셨다. 몇 대 맞다가 이대로 있다간 죽을 것 같아서 손을 막았다.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일 뿐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하고 결혼하느니 혼자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다 같이 살아도 괜찮겠다 싶은 사람이 생겼는데 그게 남자다. 부모님은 결혼이 선택이라는 것에서부터 이해하지 못하셨다.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언제나 생각해 왔고 또 사회생활로 다져진 경험이 있어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렇게 절실히 느낀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내 편으로 서 있을 것만 같았던 가족은 집에 없었다. 그 부재에 인간은 언제나 혼자일 수밖에 없단 것 또한 절감했다. 그나마 하나 있는 남동생이 이해해 줘서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동생은 집안 상황을 봐 가면서 연락하겠다고 언질을 줬다.
연휴가 끝나고 만난 쿠로오는 새파랗게 든 멍을 보며 걱정했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후에 쿠로오는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갈까’ 하는 농담도 했지만, 그 당시에는 조용히 나를 토닥였다. 이래서 더 너랑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한 거였는데.
떠올리다 보니 또 울컥 치밀었다. 내가 그르고 부모님이 옳다는 게 그분들이 생각하는 답이라면 나 역시 두 분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진 않았다. 이 나이 먹고 아직도 이겨야겠다고 생각하는 내가 철이 없는진 모르겠지만, 납득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좋아하는 일 해서 돈 벌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면서 사는 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거랑 다를 게 뭐지. 답답함에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봄보다는 가을에 가깝게 푸르고 또 푸르렀다. 정신 차리니 나도 모르게 태어나서 살고 있는 것뿐이지만, 이렇게 사는 인생 살아서 무엇하나. 지금은 쿠로오가 좋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 결국 좋아하는 감정은 사라지고 흔히 어르신들이 말하듯 정 때문에 살게 될 텐데. 변하지 않는 건 없고 나도, 그도, 또 모두가 죽음을 향해 달려갈 뿐인데 이렇게 힘들게 살 필요가 뭐가 있지. 한 점 흘러가는 구름처럼 그냥 살다 가면 그만인걸. 문득 내게 ‘환갑 지난 어르신 같다’고 했던 후배가 생각 나 웃었다.
그러다 눈앞에 불쑥 나타난 사탕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쿠로오가 늦어서 미안하다며 손을 모은 채 내민 사탕이었다. 편의점 근처에서 파는 걸 본 적은 있는데 사람 머리만 한 크기의 막대사탕이었다. 이거 무기로 쓰기 좋지 않겠냐며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어 웃음이 나왔다.
“원래 이런 거 챙겼었나.”
“안 좋아할 것 같긴 했는데. 그냥 기분이지 뭐.”
자리에 앉은 채로 나는 사탕을 만지작거렸다. 겉보기에는 막대사탕이랑 똑같은데 안에는 또 작은 막대사탕 몇 개가 들어 있는 모양이다. 과대포장. 내가 너를 이렇게 신경 써서 선물을 준다는 의미가 더 클 사탕이고, 가격을 생각해도 술 한 잔을 더 마시고 말겠지만 그래도 쿠로오는 생각해서 사 온 거겠지. 아까 그 남고생 옆에 얼굴 붉히고 지나가던 여자애처럼.
“네가 웃었으니까 됐어. 사 온 보람도 있고.”
웃는 그 얼굴에 답례로 줄 만한 선물은 없지만, 뭐라도 사 줄까 싶은 마음이 일었다. 살아 있을 이유도 없고, 빨리 다 끝나 버렸으면 싶다가도 그래도 지금 내가 현실에 있을 수 있게 지탱해 주는 건 너니까. 언제 변하게 될지 몰라도 지금은 네가 참 좋다고. 앞으로도 인생에 넘어가야 할 산은 많지만 그래도 같이 있으면 괜찮겠지?
가볍게 쿠로오의 어깨에 머리를 부딪쳤다. 이동하려던 그는 멈칫 서면서 나를 봤다. 방금 네가 웃어준 것처럼 나도 그렇게 웃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할 수 있는 한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쿠로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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