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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다이 전력 60분 낙인

중독된 깡 2015. 6. 6. 23:11










추노 + 조선 +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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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벌어진 대문으로 들어설 때부터 남자는 이 고을에서 야마모토가 유명세를 떨치는 이유를 짐작했다. 기왓장이 얹힌 집만 다섯 채가 넘었고 노비들이 사는 집도 언뜻 보기에 열 채를 넘는 듯 했다. 거느린 노비가 100명을 웃돈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역시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은 아니란 말이지.

야마모토 가. 본디 야마모토 가는 몇 대에 걸친 양반 집안으로 유명했다. 24대 임금 때부터 관직에 올라 2세기가 넘도록 관직에 종사하고 있는 가문이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이제 남은 것은 그 이름뿐으로 유명세가 이제까지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은 타카시가 당주 자리에 오르면서부터였다. 

조정에서 받은 공문이 아니었다면 이 집에는 발조차 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쿠로오는 앞에 앉은 타카시를 마주했다. 관상이라는 것이 적어도 날 인 물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뭐 사람은 다 생긴 대로 산다는 거지. 선대는 딱히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정실에게서 아이를 얻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타카시를 그 자리에 앉혔다. 돈으로 관직을 샀다고 뒷이야기가 나돈 것도 그때부터였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당주가 이 모양이라서 그런 걸까나. 공문을 전달한 쿠로오는 급히 자리를 뜨려 했지만, 야마모토는 그를 붙잡았다. 모처럼이니 한번 보고 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음흉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며 쿠로오는 최근 야마모토에 대해 나돌던 소문 역시 가감 없는 진실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도망간 종놈이 있어 잡아오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천하에 야마모토 가에서 노비 새끼 하나 관리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확실히 본보기를 세우는 게 좋지요. 마침 잘 됐습니다. 보고 가시지요. 쿠로오 가의 종들도 데려와 이 꼴을 보게 하는 게 좋을 텐데. 종이란 것들은 본디 천한 태생이라 생각하는 것도 천할 수밖에 없는 법이지요.”

야마모토가 노비라면 나이를 불문으로 손을 안 댄 여자가 없단 사실은 그의 행실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노비는 주인의 물건과도 같았다. 개미 새끼 한 마리만도 못한 노비는 일생 주인이 명에 따르며,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가축이었다. 어미부터 그 자식까지 야마모토의 아이를 밸 지경이 되자 보다 못한 노비가 나서 주인에게 칼을 꺼내든 것이다.

정정했던 야마모토 선대가 일찍 귀천한 건 이놈 때문일지도 모르지. 쿠로오는 불구경을 한단 생각으로 얌전히 그를 따라갔다. 이놈도 이놈이지만 소문이 사실이라면 참다못해 칼을 꺼내 든 노비의 낯짝도 궁금해진 탓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은 노비는 오랏줄에 묶여 있었다. 햇볕으로 검게 그을린 피부는 새까맸다. 하지만 옷차림만 제외하면 그는 노비라 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는 아지랑이 속에서도  타오르고 있었다. 관직에 올랐으면 청렴한 선비가 되었을 상인데. 딱 보아도 듬직해 보이는 풍채와 올곧은 얼굴에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렷다!”

호통이 궐 안에 울렸다. 하지만 노비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앉아 있었다. 무엇 하나 꿇릴 것 없다는 그 모습에 쿠로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내 죄요. 알거들랑 말해 보시오.”

“이놈이?!”

“양반이면 다냐? 야마모토 어르신은 존경할 만한 분이셨지만, 넌 아니다. 양반의 피를 가졌다 해서 전부 양반인 줄 아나? 사람이면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거늘 내 어미도, 누이도 너 같은 더러운 양반보다는 훨씬 더 사람답다는 걸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노비는 노비답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어디 먼저 가신 선대 앞에서 네놈이 그리 당당할 수 있는지 보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들을 가치도 없다. 여 봐라!”

노기를 주체할 수 없는지 붉으락푸르락 한 야마모토의 얼굴은 오니를 떠오르게 했다. 그가 명하자, 다른 노비가 움직였다. 노랗게 달아오른 인두 끝에 쿠로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장난이지, 이거? 도망쳤던 노비가 붙잡혀 오면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얼굴에 노비 자를 새긴다는 사실은 익히 들은 적이 있었으나,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풀어헤친 가슴팍에 인두가 닿았다. 치익거리는 소리에 이어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지켜보던 다른 자들은 인상을 찌푸리거나 눈을 가렸으나 야마모토만은 미소를 지은 채 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쿠로오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그를 지켜보았다. 

과연. 그런가. 얼굴은 구겨졌지만 노비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비명 소리 하나 내지르지 않는 그는 눈을 치켜뜬 채 야마모토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 반드시 너를 죽이고야 말 것이다. 까딱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노비는 하나 꿀릴 것 없이 답한 데다 주인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쿠로오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그놈 참, 재밌는 놈이로구나.

시간이 지나도 끄떡하지 않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당주는 조금 전의 당당함과는 달리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이라면 괴로워해야 할 게 분명한데, 사와무라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으니 언젠간 정말 그에게 칼을 맞지 않을지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당장 죽이라 명하기에는 조금 전 쿠로오에게 ‘종놈 하나 관리하지 못해서야’하고 언급했던 말이 거슬렸다. 집에 둔다 해서 좋을 것은 없는 놈인데. 노비 시장에 내놓아도 팔릴 놈인가. 야마모토가 입술을 깨물고 고심하던 차에, 쿠로오가 말했다.

“저놈 이름이 무엇이오?”

“종놈이 이름을 알아서 무엇하오?”

“저 골칫덩이를 해결해 주겠다는 것이오.”

선심을 베풀 듯 방긋 웃은 그는 조심히 야마모토에게로 다가갔다.

“자네도 언제 칼을 들이밀지 모르는 잡것을 집안에 들여놓고 싶진 않을 것 아니오. 주인을 죽이려 한 놈을 시장에 내놔 봐야 잘 팔리지도 않을 테고. 내게 팔면 죽여 마땅한 노비새끼를 팔아넘겼다는 선처와 더불어 돈까지 벌 수 있지 않겠소?”

속삭이는 듯 작은 목소리에 야마모토는 쿠로오를 보았다. 일 잘하는 사와무라를 넘기는 것은 탐탁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보다도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세간의 소문 때문에라도 그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좋네.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그 말과 함께 야마모토의 손이 움직였다. 노비들은 서둘러 인두를 떼어냈다. 살점이 타들어 간 가슴팍에는 奴 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