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겨워….”
왕좌에 앉아 평화로이 시간을 때우던 오이카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손가락으로 딱딱 팔걸이를 쳐가던 손은 어느새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다 이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우유빵 먹는 것도 이제 질렸다고! 대체 이와쨩은 왜 이렇게 늦는 거야?!”
‘그야 전에 말했듯이 대왕님을 만나러 오는 걸 두 사람이 미루고 있으니까.’
해줄 말은 뻔했기에 쿠로오는 입을 다문 채, 조용히 테이블 위에 놓인 차를 마셨다. 쿠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 다가오며 불평불만을 토하는 남자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와쨩도 토비오쨩도 바보 같아! 왜 몇 번이고 다녔던 길을 기억도 못 하고 그 쉬운 걸 헤매는 거야. 거기다 친절하게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더 빨리 오지는 못할망정 샛길로 빠지고…. 투덜투덜 이어지는 말소리에 쿠로오는 고개만 끄덕이며 듣는 시늉을 했다.
멋대로 공주를 납치해 온 게 누군데. 거기에 오기도 힘든 곳에 성을 쌓아 올린 것도. 거기에 두 사람이 뛰쳐나갈 사정이 생기게 한 것도 결국은 너잖아. 너무나도 당연한 걸 투덜거리는 통에 쿠로오는 말할 의욕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오이카와는 별 대답 없는 쿠로오의 반응에 시큰둥해진 건지 풀이 죽어 다시 자리로 가 앉았다.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삐죽이는 것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애초에 저 녀석은 문제를 잘못 짚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가늘게 뜬 눈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보던 쿠로오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 들어주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재밌을 것 같으니까.
손에 들고 있던 수정 구슬을 내려놓은 그는 대왕의 앞까지 걸어갔다. 다가오는 쿠로오의 움직임에 용사일행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킨 오이카와는 그의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축 늘어졌다.
“대왕님, 너 말야.”
“뭐야, 쿠로쨩.”
팔을 들어 얼굴까지 가린 오이카와는 귀찮다는 듯 답했다. 이 자식이…. 지금 귀찮은 사람 돌보고 있는 게 누군데.
“결국 네 친구나 그 망할 후배놈이 널 찾아와주길 기다리는 거 아냐? 공주를 납치해 왔다는 건 ‘내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여기로 찾아와 주세요’라는 거잖아.”
쿠로오는 이곳에 오기 전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외로움 타는 녀석이니 잘해주도록 해.'
아, 맞아. 그 말이 딱이네.
“어지간히 외로움 타는 녀석이네.”
하지만 오이카와는 순순히 인정하기 싫었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쿠로오에게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쿠로쨩. 외로움이라니? 둘한테 여기로 와주세요는 맞지만, 부숴 버리고 싶은 인간이 있으니까 그런 게 당연하잖아. 써달라고 해서 자비를 베풀어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성을 뛰쳐나간 녀석따위 짓밟아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내가 보기엔 그게 아닌 것 같은데.”
“하? 뭐가 아닌 것 같은데?”
쿠로오는 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미치미야 공주를 데려오고 한 달이 넘도록 오이카와는 성 안에만 있었다. 간혹 쿠로오나 시미즈를 보내 용사파티를 상대하는 일은 있었으나 직접 모습을 내비친 적은 없었다. 최종보스는 마지막에 대면하는 게 맞는 거라던가,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한 애피타이저라던가 하는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쿠로오 입장에선 뭐가 되든 일을 벌이는 것이 귀찮아 가만히 있었던 것뿐이었지만, 오이카와의 말과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었다. 단순히 그 친구랑 후배가 널 두고 나가서 그러는 게 아니라?
갈색 눈이 눈을 똑바로 마주하자 오이카와는 방긋 웃으며 그의 시선에 응대했다.
“그리고 쿠로쨩 수정 구슬이 이상한 거야. 애들한테 제대로 오는 길 알려주라고 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잖아.”
“그런 건 구슬로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냐. 아닌 건 네 얼굴을 보고 알아채는 거라고.”
쿠로오 역시 방긋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거기다 곧이어 얼굴 가까이 다가온 손이 오이카와의 눈을 가렸다. 뭐하는 거냐고 말하기도 전에 쿠로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신경 쓰면 안 피곤하냐?”
그 말에 오이카와는 마음이 상해 인상을 썼다. 눈을 가린 손을 쳐낸 대왕은 쿠로오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시비 거는 거야?”
“아니.”
왕좌에 눕다시피 한 오이카와의 위로 쿠로오가 몸을 엎드려 그를 가뒀다. 의자에 등을 딱 붙이고 앉은 오이카와는 갑작스레 다가온 쿠로오의 얼굴에 당황했다. 가까워. 가깝다고, 이 녀석. 밀쳐낼까 했지만, 축 늘어졌던 팔에 쿠로오가 올라탄 자세가 되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쿠로오 내려다보는 와중에 움찔움찔 움직이는 것도 모양새가 빠지는 것 같아, 오이카와는 잠자코 쿠로오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외로워서 그러는 거면 위로해주겠다고 하는 거야.”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지만, 오이카와는 웃으며 받아쳤다.
“생각도 없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고 비켜.”
“어디가 그렇게 보이는데, 대왕님? 난 언제든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고.”
방긋방긋 웃고 있는 쿠로오였지만, 내뱉는 말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이 녀석이 왜 이럴까. 쿠로오의 성격을 보면 오이카와가 뭐라고 대답하든 간에 그는 어떤 대답으로든 능글맞게 받아칠 게 분명했다. 시미즈에게는 부탁한 일이 있어 지금 성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도와주러 올 사람은 없는 게 당연한데. 그렇다고 측근한테 힘을 쓰기도….
오이카와가 조용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쿠로오는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오이카와는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평소답지 않게 발끈해서는 협박하듯 다가오다니. 대왕은 빤히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쿠로오는 뒤로 돈 채 의자에 손댔던 팔을 움직이며 어깨를 돌려보고 있었다. 안 쓰던 몸을 움직였으니 뻐근하기도 했겠지. 여기 와서 한 거라곤 수정 구슬을 만지는 일뿐이었으니. 단순히 심심해서 해 본 장난이었나. 오이카와는 잊을세라 그에게 명령했다.
“어쨌든 제대로 하라고 쿠로쨩. 저 녀석들 빨리 여기 오게 하지 않으면 또 다른 길로 새 버린다고.”
“예예. 대책을 마련해 보죠, 대왕님.”
자리로 돌아간 쿠로오는 수정 구슬에 손을 대며 용사일행의 위치를 확인했다. 아직 성에 도달하려면 한참을 더 있어야 하는 거리였다. 더 빨리 오게 하고 싶어도 저 녀석들이 무의식적으로 대왕님을 피해 가는 건데, 어떻게 하라는 거야. 거기다 얼마나 걸릴지도 네 손에 달린 게 아니라 그 남자 손에 달린 거라고. 안 그래도 지금 이 상황도 보고 있었을 텐데…. 나중에 또 한 소리 듣는 거 아냐?
‘일 처리에 이상이 생길 일은 없겠지. 나는 너를 믿는다. 쿠로오.’
성에 들어오기 전 만났던 그를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상이 생긴다면 이라는 전제는 입에도 담지 않았다. 실패하면 다음은 없다는 말인데…. 쿠로오는 양팔을 붙잡은 채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그러다 힐끗 오이카와를 봤다. 대왕님은 왕좌에 앉아 태평한 얼굴로 우유빵을 집어 먹고 있었다. 쯧, 어쩌다 그 녀석 눈에 들어서는. 쿠로오는 혀를 차며 안타까운 듯 눈을 돌렸다.
Fin.
우시오이라 해야 하나 쿠로오이라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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