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배구

쿠로다이 겨울밤

중독된 깡 2016. 12. 9. 22:15









“회사 상사가 아니라 인생을 오래 산 선배로서 얘기하는 거야. 이러는데. 조언? 조어언~? 누가 그딴 거 해달라고 했습니까 이 자식아? 듣기 싫어하는 거 알면 얘길 하지 말든가!”


“지, 진정해. 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한결같은 얼굴이었다. 모두가 어엿한 사회인으로서 일하고 있는 처지였다. 뭐 인생사 누구나 다사다난하고 이것저것 있는 법이지만 꿈꿔왔던 만큼 찬란한 미래도 좌절했던 만큼 암울한 미래도 없었다. 플러스마이너스 제로. 마치 그 법칙을 지키기라도 하듯 인생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법이 드물었다. 잔을 들고 술을 따르고 몇 번을 이어지던 스가의 푸념은 테이블에 녹다운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제 목소리를 내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이상적인지 사회에 나와서야 실감했다. 우리는 늘 착한 어린이가 되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힘쓰라 배우지만 몸소 실천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막차 조금 전에 지하철을 탔다. 어두운 밤 풍경 속에 반짝반짝 빛을 내며 밤을 밝히는 건물을 보면서도 이제는 멋있다는 감탄보다 저 안에서 업무와 씨름하고 있을 불쌍한 직장인이 떠올랐다. 뭐 사회에 찌들 대로 찌들어버린 거지. 도쿄에 살면서 찌들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나.


정류장에서 내려 집까지는 걷기로 했다. 마을버스가 눈앞에서 떠나 버린 탓도 있었지만, 알딸딸한 기분으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였다. 퇴근 시간 다 되어서야 급하게 잡힌 약속이었기에 쿠로오에게도 늦게 연락했는데. 그 자식 혼자서 또 라면이나 끓여 먹고 있는 거 아닌가 몰라.


편의점 앞에서 만두며 호빵을 손에 들고 가는 고교생들이 보였다. 아, 옛날 생각나네. 그것도 벌써 십몇 년 전이냐. 목도리를 고쳐 매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미야기에서 봤던 하늘은 이렇지 않았는데. 좀 더 별도 반짝반짝하고 공기도 맑아서 한겨울에 숨을 몰아쉴 때면 몸속 깊은 곳까지 맑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현실은 도쿄의 미세먼지겠지. 아, 나도 늙었나 마흔 줄이 가까워 오니까 잡생각만 많아져서는….


피울까. 담배 생각이 간절해져 편의점 앞에 섰다. 늦은 시간 편의점 안에는 알바생 하나뿐이었다. 이 뒤로는 빌라며 주택이며 주거단지만 줄지어 있으니 아마 사람은 드물 터였다. 한 대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녀석한테 걸리면 혼날 텐데. 아니 다 큰 어른이 담배 좀 피우는 게 뭐 어때서. 문 앞을 서성이며 고민하던 나는 알바생의 눈초리에 몸을 돌렸다. 가자, 가. 안 피우면 되지 까짓거.


“어라, 사와무라 군?”


“뭐야. 아직 안 들어갔었냐?”


벌써 집에 들어가 잘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동거인이 떡하니 눈앞에 나타나 옆에 붙었다.


“다이치가 마시고 온다길래 나도 뭔가 마시고 싶어져서. 보쿠토 이럴 땐 꼭 나와주니까.”


심심풀이 상대였던 거냐고.


“아아, 잘 산대?”


“그 녀석이 못 산 적 있냐.”


“큭. 하긴….”


새어 나온 웃음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보쿠토는 여전히 배구 바보에 대표팀에서 배구를 한다.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약했던 멘탈 쪽도 어떤 연유에서인지 강화가 된 탓에 제법 좋은 선수가 되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안 추워?”


“추워. 엄청 추워.”


정색하며 말하자 쿠로오는 내 손을 붙잡았다. 손바닥 위에 놓인 건 따듯한 캔커피였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내 코트 주머니 속으로 캔커피와 제 손까지 같이 넣어버렸다. 따듯하긴 하네.


“집구석에서 라면이나 먹고 있었으면 혼내 주려고 했더니.”


힐끗 눈을 흘기자 녀석은 영혼 없는 얼굴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에이. 저는 사와무라 군한테 혼날 짓은 애초에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 치곤 너무 자주 혼나지 않냐.”


“에이, 왜 그래. 요새는 빨래랑 화장실 청소도 다 잘하고 있잖아. 식사당번도 꼬박꼬박!”


칭찬해 달라는 듯 머리까지 숙여 들이미는 통에 나는 마지못해 뻗친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그래. 잘했다, 잘했어. 그 칭찬을 끝으로 나도 녀석도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집까지는 아직 십여 분 정도 거리가 남아있었고, 우리는 길을 따라 뚜벅뚜벅 발걸음을 이어갔다. 쿠로오와는 오랫동안 같이 지낸 탓에 둘 사이에 침묵이 찾아와도 아무렇지 않게 그 침묵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혼자 돌아오는 퇴근길은 이상하게 감정들이 뒤얽힌다. 하루가 고단했을 때는 이제야 쉴 수 있어라며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에 오지만, 막상 집에 들어오면 해야 할 일들이 수도 없이 많다. 당장 먹어야 할 저녁부터 시작해서 빨래 설거지 청소. 하다 보면 한 시간 정도는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린다.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에는 술자리에서 있었던 아무래도 좋을 재밌는 이야기를 상기하며 돌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만남 뒤에 혼자 남겨지는 건 또 굉장히 공허함을 불러일으켜서 괜히 울적해지기도 한다. 


나는 왜 이 회사에서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고 또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해야 할까. 정년퇴직할 때까지? 그 이후에는? 100살까지 산다는 끔찍한 노년에는 대체 뭘 해 먹고 살지? 삶이란 그만큼 덧없는 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사람들이 수도 없이 이야기하는 인생 별거 없다는 말이 결국은 정답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진다. 방금 마시고 왔는데도 또 술이 당기는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낙엽은 전부 바람에 날리거나 눈에 묻혀 사라졌다.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주머니 속에서 꿈틀거리는 손가락에 고개를 들자 쿠로오가 나를 보고 있었다.


“웬 한숨이야.”


그런 우울한 감정도 돌아갈 곳이 있다면, 기다려줄 사람이 있다면 조금은 의미가 변한다. 간신히 일자리를 구하고 막 회사에 뛰어들어 뭣도 모르고 굴러가면서 밑바닥부터 시작해 사회생활을 배워 갈 때, 쿠로오는 의지가 됐다. 그리고 지금도. 녀석은 여전히 내가 이 세상에 있어야 할 이유 중 하나다.


“…그냥.”


가볍게 웃어 넘겼는데 쿠로오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밀쳐내고 싶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사뭇 진지한 얼굴로 녀석이 입을 열었다.


“사와무라 군 완전 사랑에 빠진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데.”


능청스러운 장난인 게 뻔히 보였다. 캔커피를 쥔 손으로 쿠로오의 손을 꽉 붙잡았다. 사람이 모처럼 감상에 젖어서 말야. 좋게좋게 생각하려고 하는데 너는…. 아프다며 엄살을 피우던 쿠로오는 그래도 손을 빼지 않았다. 차갑던 손끝에 감각이 돌아왔고 맞닿은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무언가 말해주고 싶지만, 지금 말했다간 또 장난스레 달라붙을 게 뻔하니까. 네가 옆에 있다는 게 소중해서, 또 안심이 돼서 더없이 좋다고. 전하지 못한 말을 마음 깊숙한 곳에 꼭꼭 눌러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