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밖에는 울긋불긋 물든 나무들이 교정을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길을 지나는 동안 발에 차이던 낙엽은 지금도 바람을 따라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가을도 반쯤 지났나. 조금 있으면 나뭇잎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만을 드러낸 채 찬바람이 몰아칠 터였다. 그리고 내년이면 졸업반이다.
할 마음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코치의 명함은 아직 지갑 속에 있었다. 호주로 오겠다면 받아 주겠다는 린의 이야기 역시 농담 삼아 한 얘기가 아니란 걸 알고 있기에 졸업 후의 진로는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그런 스카우트 이야기가 아니어도 진학하자마자 휴학을 결정한 건 후에 선수생활을 재개하기 위해 몇 년간 했던 재활치료 때문이었으니까. 어릴 적부터 가져왔던 꿈이란 건 생각보다 쉽게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린과 함께 수영할 수 있다는 건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지만, 외국에서 쉽게 적응할 자신도 없어 망설였다. 별반 다를 건 없다고 생각해도 일본만큼 편한 데는 없을 것 같고. 하루카도 몇 주 전에 호주로 갔다고 했다. 소속을 옮기는 김에 조건이 좋은 곳을 찾아 추천해 줬다는 린의 말에 그러려니 했다. 여기 대우도 안 좋진 않았겠지만, 하루카에게는 일본보다 외국의 방식이 더 맞을 것 같으니까.
지금 수업자료를 띄운 채 침을 튀기며 강의하는 교수님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시선을 돌린 이유는 앞자리에 앉은 두 사람 때문이었다. 조잘조잘 떠드는 목소리가 낮은 교수의 목소리보다도 더 잘 들렸기에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중간에 앉았다고 생각했는데, 수업시간 10분이 지나서야 비어 있던 앞자리에 떡 하니 들어앉은 두 사람은 차라리 뒤에 앉는 게 나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갖은 애정행각을 다했다. 교수님은 힐끗거리며 눈치를 주었지만, 남녀는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딱 붙어 있는 책상 위로 깍지 껴 붙잡은 손이 보였다. 감응하는 건가. 짐작에 불과했던 게 사실이 된 건 움찔거리거나 떨리는 움직임이 보인 데다 갑자기 조용해졌다가 눈을 마주치고 웃는 등 감응의 여파로 보이는 여러 행동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여자 쪽이 PS. LS와 PS가 서로 주고받는 감정 교환이지만 감응 시에는 확연히 PS에서 LS 쪽으로 가는 게 더 많아 보인다. 단번에 PS를 알아본 건 일부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색채가 보여서였다.
센터에서는 이걸 가시색채라는 전문용어를 써서 부르는데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마도 감정이라 추정되는 무언가가 보이는 것뿐이다. 가시색채는 사람마다 각양각색이고 또 보는 사람에 따라 보이는 방식도 천차만별이라고 들었다. 볼 수 있는 사람은 다섯 명 중 한 명꼴이라는 것도 들었다. 일단 분위기 파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니까 쓸모없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남 눈치를 본 적도 없지만.
내가 보는 이미지는 주로 물이었다. LS쪽이 리트머스지처럼 PS의 감정을 흡수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쪽은 연인 사이라 그런지 여자에게서 나온 주황색의 물이 회오리치듯 동그란 모양으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어져 있었다. 위협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감정의 표출일 텐데, 둥그런 모양의 물은 지킨다는 느낌에 가깝게 남자를 중심으로 주변에서 돌고 있었다.
반면 남자에게서 나오는 감정은 연인이라 할 만한 핑크빛으로 눈송이처럼 작은 물방울이 공기 중에 방울방울 떠 있었다. 남자의 색채 역시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거리에서 여자를 감싼 채였다. 주변을 서성이는 모양이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아끼는 마음이 드러나는 듯했다.
서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커플. 파트너가 된 게 먼저였을까, 연애 감정이 생긴 게 먼저였을까. 의문도 잠시 고개를 내둘렀다. 둘이 연애를 하든 뭘 하든 상관없으니 애정행각은 강의실 말고 다른 데 가서 해 주면 좋겠는데.
꽃이 만발한 앞자리를 보면서 교수의 얼굴을 살폈다. 점점 더 굳어가는 그 얼굴에 다른 학생들은 조용했지만,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한마디 하는 게 좋을까. 학기가 반이 지났는데도 이 수업에서 처음 보는 얼굴들이라 인상이 안 좋아진다 한들 신경 꺼도 될 것 같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표정을 구겼을 때, 교수가 말했다.
“거기 학생 둘.”
교수는 눈을 치켜뜨고 두 사람의 자리로 다가왔다. 무색의 주변 공기를 물들이던 색채가 한순간에 변하더니 곧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대신 이제는 교수의 색이 나타났다. 교수 자신을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에 남색으로 만들어진 육면체의 벽이 생겼다. 원래 저 사람이 가진 색과 모양일 텐데, 들었던 소문대로 가시색채마저 칼 같은 교수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하려고 들어왔습니까? 여긴 감응하라고 있는 휴게실이 아닐 텐데요?”
작은 방 같은 틀 안에 바닥에서부터 위로 물이 차올랐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이성으로 억누르려 애쓰는 모습이 색에도 드러났다. 그러나 허리춤까지 차오른 물은 출렁이기만 할 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폭발하면 파도가 돼서 몰아치려나?
흥미롭게 교수를 지켜보던 나는 느껴지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한바탕 설교를 쏟아낼 듯한 교수를 뒤로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교수가 말을 시작했다. 문에 붙은 작은 유리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자 예상했던 것처럼 교수가 선 자리에서 일어난 물보라가 두 학생을 덮치고 있었다. 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조곤조곤 따지는 모양이었다. 그러게 적당히 하라니까. 저 교수한테 한 번 찍히면 성적 좋게 나올 일은 없을 것 같은데.
휴대폰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화면에는 저장된 번호가 떠 있었다. 센터 담당자. 격월에 한 번 있는 상담은 저번 달에 했었는데. 설마 파트너가 바뀌었단 소식인가. 바꿔도 상관은 없다만. 복도 쪽으로 나가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야마자키 씨, 안녕하세요. 센터 담당자 마스다입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아, 네.”
마스다 씨와는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나처럼 감정이 부족한 LS나 넘치는 PS들을 연결해 주는 사람으로 도쿄에 온 뒤로 줄곧 담당자였다. 일 처리가 깔끔한 게 맘에 들어 담당자 변경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저 실은 야마자키 씨랑 비슷한 분이 계셔서요. 오랫동안 파트너였던 LS가 외국에 가는 바람에 긴급한 PS 환자분이 계시거든요. 마땅히 연락드릴 만한 분이 없어서 고민하던 차에 야마자키 씨가 생각났어요. 야마자키 씨는 파트너 변경 주기도 짧으니까 금방 적응하실 것 같고. 또 비슷한 경험을 하셨으니 다른 LS분들보다 환자분을 더 잘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 해서요. 가능하다면 빨리, 아니 지금 당장에라도 센터로 와 주실 수 있나요?”
부탁이었지만 강요에 가깝게 들린 마스다 씨의 요청에 그녀의 색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보라색 물결이 동요해서 흔들리고 있겠지. 담당했던 기간이 길었던 만큼 마스다 씨는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도쿄에 오고, 그 무렵 다시 파트너가 됐던 린을 호주로 떠나보낸 후 정해진 PS 없이 정기적으로 파트너를 바꿔 왔으니까. 재활치료를 하게 된 것도 마스다 씨의 도움이 컸기에 나는 그녀의 부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스다 씨한텐 도움 받은 적도 있고…. 몇 시까지 가야 해요? 저 강의가 조금 남아서.”
내 말에 그녀는 고맙다며 시간을 일러주었다. 오후 네 시. 이번 강의가 끝나고 가면 조금 일찍 도착할 수 있을 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교를 하던 교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강의를 하고 있었고, 커플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변을 감도는 분홍과 주황의 물결은 여전했지만 혼나기 전과 달리 잠잠해져 있었다. 설명하는 교수의 색채는 이전과 다름없이 차분하게 돌아가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화내고 난 뒤에 겉으론 아무렇지 않아도 속으론 거칠게 몰아치기 마련인데, 각이 진 육면체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요하게 멈춰 있었다. 화낸 직후에도 이전과 같은 감정 조절이 가능하단 말이다. 저런 사람이 진짜 어른이란 말이지.
마스다 씨와의 통화 후에는 커플이 조용해졌는데도 좀처럼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급하게 파트너가 외국에 갔다고 했을 때는 얼핏 누군가가 스쳐 갔다. 괜한 마음에 연락처를 뒤적이며 이름을 찾았다. 그 정도로 심각했다면 미리 연락하지 않았을까. 그 녀석 성격이라면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괜한 억측일 거야.
딴 짓을 하던 사이에 다음 시간에 보자는 교수의 말이 들렸다. 사람들이 일어나 나가기 시작했고, 나도 곧바로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환자가 누구인지는 가서 봐도 늦지 않으니까.
2
내 가시색채는 검은색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그랬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색채였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었고 또 내 기분에 따라 모양을 바꾸는 색이었기에 암흑 같은 검은색도 무섭지는 않았다. 간혹 야단을 맞을 때는 회색으로 변하고 칭찬을 들을 때는 진한 검정을 띄는 색채였다. 그래서 나는 가시색채를 좋아했다. 내 감정이 가시화된 것뿐이지만, 나조차도 모르는 내 기분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색채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야마자키 씨랑 비슷한 분.’ 마스다 씨의 그 말은 좀처럼 달갑지 않았다. 거기에 긴급한 환자라고 했지. 환자가 누구든 쉽사리 치료 가능한 사람은 아닐 게 분명했다. 마스다 씨가 날 떠올렸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만큼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이겠지.
린이 호주로 유학 가면서 중학생이 된 나는 급격한 결핍에 시달렸다. 친구로서 의존하고 또 주고받았던 게 많았던 터라 한 파트너와 보낸 시간이 길었던 만큼 바뀌는 환경과 파트너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소중한 사람이 곁에서 떠났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그때의 나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그럴 때 마스다 씨가 날 도와줬다. 몇 번이고 파트너를 바꿔 가며 맞는 사람을 찾아다니던 그때,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다. 야마다 씨. 대학생이었고 심리학을 전공한다던 그는 린 이후에 가장 오랫동안 나와 파트너였던 사람이었다.
야마다 씨가 나와 감응하며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내게 울고 싶으면 울라고 했지만, 눈물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 반작용인 것처럼 야마다 씨는 나와 감응할 때마다 엉엉 울었다. 마치 내가 울고 싶은 걸 대신 울어 주는 것처럼. 만날 때마다 울다 보니 좀처럼 울지 않는 나도 그를 위해 습관처럼 손수건을 들고 다녔다.
린이 떠나고 나는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 모든 걸 함께 나누던 친구이자 파트너가 사라지고 난 후에 항상 같은 풍경이었던 세상이 무채색으로 물들어갔다. 검은 물결은 멈춘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감정의 절제보다도 결핍에 가까운 증상이었다.
두 사람의 도움으로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흑백의 세상이 점점 원래의 색을 되찾아 갔다. 떨어졌던 수영 기록도 다시 올릴 수 있었고, 어깨 부상으로 힘들었던 시기도 다시 넘어설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 기억은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공부하러 간 야마다 씨는 헤어질 때도 내가 또다시 유학으로 파트너를 잃고 힘들어하진 않을까 걱정했다. 출국하던 그날, 공항에 배웅 나갔을 때, 내게 새로운 트라우마가 생기는 건 아닐지 염려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유학 간 이후에도 야마다 씨와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제 와 그 기억을 떠올리는 건 오래된 일기장을 열어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때와는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파트너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방법을 익히고 나니 그동안 야마다 씨나 린과 너무 깊게 관계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기적으로 파트너를 바꾸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다음부터는 줄곧 그렇게 해 왔다. 감응하지 않으면 위험해지니까 하는 것뿐인 그런 관계. 서로 터치할 것도 없이 그 정도로 유지되는 관계가 오히려 편했다. 깊게 파고들수록 내가 그에게 받아야 하는 것도 줘야 하는 것도 더 많아지니까.
그래서 마스다 씨의 부탁이 거슬렸다. 환자의 상태를 모르니 단언할 순 없지만 마스다 씨, 설마 그 환자의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할 작정인가? 물감이 퍼지듯 흩뿌려진 검은색이 보였다. 색은 나쁘지 않지만, 동요하고 있다는 건 감출 수 없었다. 상태가 어떻든 상태가 심각한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나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만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
센터에 도착해 야마다 씨가 알려 준 병실로 찾아갔다. 1인 병동. 상태가 심각한 환자들을 입원시키는, 좋게 말해 입원이지 중환자들끼리 영향을 받지 않도록 나눠 둔 격리실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중학교 때 이후로 여기 오는 건 처음인데. 치료용으로 놓아둔 아로마 향이 났다. 중환자들에게 이런 치료가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다만.
문을 열기 전 나는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어. 내가 받았던 것처럼 똑같이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는 것뿐이다. 대신 주의할 건 하나 있다. 상대가 어떤 감정을 드러내더라도 잘 받아줄 것. 어떤 잘못이 있더라도 비난은 하지 않을 것. 마스다 씨와 야마다 씨가 몇 번이고 일러주었던 파트너 계약서의 조항들을 떠올리며 나는 문을 두드렸다. 노크가 끝나자 마스다 씨의 들어오란 말이 들렸다.
손잡이를 돌리고 병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익숙한 색이 바닥에 퍼져 있었다. 화학 약품에서나 나올 법한 진한 초록의 물이 병실 곳곳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분위기라고 할까. 느껴지는 기운에 얼굴을 보니 예상했던 사람이었다. 혹시나 싶었는데.
마주친 초록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네가 여기에?’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당황한 건 내 쪽이었지만, 표정 변화가 있어선 안 된다. 불안정한 환자에겐 타인의 반응 하나하나가 큰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니까.
“왜…? 왜 소스케가 여기 있어?”
소개를 해 주려던 마스다 씨가 무안하게 마코토의 입에서 먼저 말이 나왔다. 침대 위에서도 잔뜩 웅크린 마코토는 처음 눈이 마주친 이후로 계속 바닥만을 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후에 머리를 감싼 마코토의 두 손은 떨림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심각하네. 주변에 LS가 없었을 리는 없고, 거부 반응인가. 아니면 상대가 나라서 당황했나. 마스다 씨는 놀란 눈으로 나를 봤고,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도와주려고 왔으니까.”
파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이어 꽉 깨문 입술까지도. 마지막으로 본 게 하루가 유학 가기 전 송별회였으니까 3주 정도인가. 그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 사이 이렇게 핼쑥해진 건가. 초록빛을 띠던 마코토의 가시색채는 어떻게 보면 독가스처럼 보일 수도 있는 색이었지만, 이 녀석에게 어울리는 밝은 색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늪처럼 질척일 것 같은 기분 나쁜 색을 띠고 있는 데다 모양 역시 수습이 되지 않았다.
색채는 몸에 닿아도 해롭지는 않다. 다만 보이는 사람의 기분 문제인데, 이런 건 몸에 닿아도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코토의 넘쳐흐르는 감정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다가갔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파, 파트너 변경해 주세요. 소스케는 안 돼요!”
이불을 꼭 움켜쥔 채 그가 소리쳤다. 안 된다고? 내가? 어리둥절해하는 내 얼굴에 마스다 씨 역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내게 입 모양만으로 구면이냐고 물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친구라고 해야 할까.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먼 것 같고, 친구라고 하자니 또 너무 가까운 것 같았다. 이 관계를 설명할 단어가 딱히 생각나지 않아, 그냥 친구라고 답하자 마스다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환자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먼저 말을 걸어보라는 거겠지. 후우. 소리 없이 한숨을 뱉은 후에 입을 열었다.
“도와주겠다고 온 사람을 문전박대하냐?”
“그치만 이런 걸 소스케한테 보여 줄 순 없어!”
절규와 같은 외침이었다. 씩씩거리며 새어 나오는 거친 숨에 섣불리 다가갈 수도 없었다. 폭주 상태였다. 1차는 이미 지나갔고, 2차 초입인가. 평소 같으면 볼 수도 없었던 모습이 눈앞에 있었기에 나는 아연실색한 티조차 내지 못하고 그를 보고 있었다.
마스다 씨 역시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는 사이라 더 쉬울 거라 생각했던 환자의 상태가 내가 들어온 후 더 안 좋아진 탓이었다. 마코토를 중심으로 생겨난 소용돌이의 늪이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였다. 마스다 씨 눈에 저게 보이진 않겠지만, 보인다면 아마 누구라도 거부감을 가질 게 분명했다.
“저, 타치바나 씨. 다음 파트너를 찾으려면 또 시간이 걸려요. 타치바나 씨 폭주 상태로 너무 오래 계셨고, 거기다 도쿄에서 야마자키 씨처럼 부르면 바로 달려와 줄 분이 그리 많지 않아요. 지금 타치바나 씨 한계잖아요. 며칠째 전혀 감응하지 않았으니까….”
다음 주까지 파트너를 구하지 못하면…. 이어지는 마스다 씨의 설명에도 마코토는 막무가내였다. 초록빛의 물결은 사그라들 줄 모르고 휘몰아쳤다. 아무리 상태가 안 좋다지만, 마코토의 이런 모습은 처음 봤기에 나는 잠자코 그를 보고 있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나아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다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해 놓고도 아차 싶었는지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노려보고 있다고 인식한 건지 마주친 눈이 황급히 바닥을 돌아갔다.
“소스케한테 이런 거 보여 주고 싶지 않아요…. 소스케가 알면 하루나 린한테도….”
폭주한 환자한테 자극적인 행동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서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보니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나는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널린 마코토의 색채가 짓밟혔지만 이미 더러워진 색이 발에 밟힌다 한들 문제는 없었다. 환자에게 해가 가는 것도 아니니까.
뚜벅뚜벅 발소리에 마코토는 다가오는 날 인식하고 몸을 움츠렸다. 벌벌 떨면서 이불을 꼭 움켜쥔 모습이 아이 같았다. 덩치만 커다래서는. 애초에 바쁜 시간 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 대체 뭘 하려고 왔을 것 같은데. 널 비웃으러 왔겠냐? 환자가 누구였든 간에 나는 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도우러 온 거라고.
털썩 그의 침대에 앉았다. 흔들리는 침대에 마코토는 힉 소리를 내며 반응했지만, 그뿐이었다. 녀석은 나를 볼 생각도 않고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떨리고 있는 어깨가 안쓰러웠다. 세상에 혼자 있다는 기분이겠지. 네가 지금 어떤 기분일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데도…. 그렇지만 돕기 위해선 네가 마음을 열어 줘야만 해.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딱딱 울리는 소리에 마코토는 고개를 들었다. 소스케는 안 된다며 소리 지를 때부터 울먹이던 울음이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튄 색채와 달리 눈가에 맺힌 눈물은 맑고 푸른 초록색을 머금고 있었다. 투명한 초록색. 마코토가 원래 가지고 있는 색채였다. 환자들이 다 그렇듯이 마코토 역시 도와달라고 이렇게 신호를 보내는 건지도 몰랐다.
눈물을 닦아 주려 손을 뻗었는데 마코토는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 감응이라고 생각했나. 환자들은 혹시 모를 감응 때문에 접촉에 민감했었지. 들었던 손을 내렸다. 머쓱해진 분위기에 뒤통수를 긁적였다.
“너, 내가 그렇게 입 싼 놈으로 보이냐? 린이나 하루한테 네가 이렇다고 말할 것 같아?”
그렇게 보고 있었다면 실망인데. 이어진 말에 마코토는 눈을 크게 떴다. 병실에 들어온 후로 처음으로 보는 평상시의 마코토였다.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멍하니 나를 보던 얼굴이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그럼 됐잖아. 도와주려고 온 거고. 겁먹지 마.”
나는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천장을 향한 내 손바닥을 마코토는 물끄러미 보았다. 감응하자는 청. 도와주겠다는 말에도 마코토는 쉽게 손을 잡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며 마스다 씨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해치지 않을게. 길들지 않은 짐승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듯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코토는 조용히 말이 없었다. 바닥으로 깔린 눈이 또르르 굴러갔다. 곰곰이 생각 중인 듯했다. 몰아치던 색채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진정이 된 걸까. 내 방식이 틀린 거라면 마스다 씨가 제재했을 텐데, 그녀 역시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는 걸 보면 다른 해결책은 없어 보였다.
이대로 있어서 상태가 악화되면 안 좋아질 사람은 본인밖에 없는데. 강제 감응이 얼마나 기분 더러운 일인지는 겪어 봐서 알고 있었다. 하긴, 폭주나 결핍이나 이상이 있을 때는 그걸 잘 모르지. 바보 같았던 자신을 겹쳐 보면서 슬슬 손이 아프기 시작했다.
“저, 절대…. 절대 말하지 마. 하면 안 돼?”
조심스레 내게 일을 연 마코토는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보고도 나를 모르진 않을 텐데. 궁지에 몰린 사람이 얼마나 약해지는지 알았기에 답답함보다도 동정심이 일었다.
“말 안 해.”
“약속… 약속해 줄 거야?”
가지가지 한다, 진짜.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대신 내밀었던 손을 움직여 새끼손가락만을 내밀었다. 오늘은 다 들어주려고 온 거라고. 네 어리광 전부 다 받아 줄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나한테 털어놔 봐.
“약속할게.”
내 손가락을 빤히 보던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닿은 새끼손가락이 고리를 물려 겹쳐졌을 때 살며시 웃는 마코토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너는 그렇게 웃는 얼굴이 제일 잘 어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