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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네코마온리 혈액순환 쿠로다이 소설 인포
3월 14일 네코마온리 혈액순환 쿠로다이 소설
3월 14일 네코마온리 혈액순환 리8 부스에 나오는 소설 Going with you 인포입니다.
책 사양
쿠로다이 소설 'Going with you'
A5 무선 전연령가 70p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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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깡
표지: 하누아님
단편 세 개가 묶인 책입니다.
차례
1. Spring is here 5
2. No smoking 31
3. Someday 51
1. Spring is here
하나하키 소재 단편
도쿄에서 생활하는 다이치가 하나하키를 앓게 됩니다. 짝사랑의 대상이 쿠로오임을 알고는 마음을 접으려 애쓰고, 쿠로오는 켄마와 사귀면서도 하나하키를 앓게 되는데...
(소제목마다 각각 시점이 다릅니다.)
1
고등학생 때부터 그런 것 같다고 어렴풋한 자각은 있었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일순간에 눈이 맞는 불꽃같은 사랑이라는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있다 해도 그건 내 이야기는 아니다. 낭만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딱 한 번, 중학교 때 여자친구를 사귄 적은 있다. 작고 귀여운 아이였는데, 두 달도 못 가 차이고 말았다. ‘사와무라는 너무 진지해.’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재미없어’였다.
남들 다 사귀는 나이에 있는 평범한 교제였는데도 그 이후에 나는 누구에게 고백하지도, 고백을 받아 주지도 않았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건 금방 변해 버리기 마련이니까. 변치 않을 자신이 없다면 고백을 해서도, 받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고백 같은 걸 생각하진 않았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을 테니까.
마지막 합숙 후에 고등학교 때는 그를 더 만날 수 없었다. 3학년. 진로를 더 중요시하라는 선생님의 만류에도 배구를 택했지만, 카라스노는 봄고에 가지 못했다. 대학생이 되어 한창 바쁠 때 카라스노가 전국에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날긴 날았구나. 하지만 스스로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별 감흥은 없었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건 있었다. 나만 잘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고, 그 당시에 카라스노에서 누구 하나 못한 사람 같은 건 없었는데도 우린 그곳에 가지 못했으니까. 네코마도 전국에는 가지 못했으니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무의미해진 지 오래였다.
도쿄에 오게 된 건 대학교 때문이었다. 진학을 선택할 무렵에는 고생했다는 주변의 분위기에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배구는 열심히 했고 남은 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애써 감싸 주려는 사람들의 반응에 숨이 막혔다. 그 사이 쿠로오는 집 근처에서 대학에 진학했고, 내가 도쿄에서 자취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연락해 종종 보는 사이가 됐다.
알바며 학점이며 정신없이 대학교를 마치자마자 운 좋게 취직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굳이 고향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어 도쿄에 있는 회사에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통지를 받았다. 주변의 친구들은 여행이나 어학연수 등의 이유로 졸업을 미루고 있었기에 4학년을 끝내고 곧바로 취직을 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고 그래서 쿠로오와 더 가까워지게 됐다.
쿠로오는 일찍이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코치가 됐다. 술을 마실 때마다 매번 나오는 래퍼토리는 비슷했다. ‘내가 감독이 되면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속 터지더라. 왜 그렇게 못하지?’ 지난 경기를 되짚으며 열변을 토하는 그를 보면 나는 이제 완전히 그쪽과 다른 세상을 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둘 사이에 화제가 그렇게 많았던 건 아니다. 취직을 빨리한 내 입장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건 어쨌든 지금 일을 하고 있는 쿠로오뿐이라, 서로 말할 상대가 없다 보니 그게 연결고리가 됐다.
답지 않게 징징거릴 때마다 우는 소리는 네 애인한테나 가서 하라고 했는데 매번 웃어넘기던 녀석이 취한 어느 날 대답했다. ‘켄마는 즐기는 걸 직업으로 하고 있어서 이해 못해.’ 스스럼도 없이 자연스럽게 커밍아웃을 해 버린 그 덕에 나도 덤덤히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코즈메와 각별한 사이인 건 알고 있었다. 소꿉친구였던 데다 합숙 때도 옆에 꼭 붙어 있었기 때문에 둘 사이가 다른 선수들과 조금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사귀고 있었구나. 쿠로오는 재밌으니까 금방 차이지도 않을 거고. 나처럼 지루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겠지.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중학생 때를 떠올리면서 나는 마주앉은 쿠로오를 봤다. 늘 장난만 치는 것 같아도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해 주는 놈이라는 건 안다. 도쿄에 혼자 사는 내가 외로울까 봐 거의 먼저 연락했던 것도, 둘 사이가 이렇게 가까워진 것도 전부 쿠로오 덕분이다.
그때쯤이었다. 구토 증세가 시작된 게. 쿠로오와 헤어지고, 집에 도착해서도 멀미라 생각했던 메스꺼움이 가라앉지 않았다. 변기를 붙잡고 있다가 올라온다는 느낌에 속을 게워냈다. 엎드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누가 등이라도 두드려주면 좋겠는데. 너무 많이 마셨나. 그런데 토했다 치기에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눈을 떴을 때는 물에 둥둥 떠 있는 꽃잎이 보였다. 그제야 이 냄새가 꽃향기라는 걸 깨달았다. 오랫동안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 잊고 있었는데. 착잡한 심정으로 물을 내렸다. 빙글빙글 돌아 내려가는 꽃을 보면서 입을 헹궜다. 세면대에 뱉어 내고 똑바로 거울을 바라봤다. 아니, 이건 아니야. 이건 절대 사랑이 아닐 거야. 나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
사무실에 앉아서도 구토증세는 이어졌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계속되는 구역질에 입을 가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보다 못한 상사가 그냥 반차 쓰고 병원이나 가라고 날 밀어냈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볼 만도 한데, 굳이 캐묻지 않은 건 윗사람의 배려였다. 점심이 되기도 전에 회사에서 나왔다. 아직 밥 때도 아니고 정장을 입고 바쁘게 오가는 사람이 조금 보일 뿐,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이유는 대강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토한 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는지도 혼란스러웠으나 나는 병을 낫게 해줄 곳으로 향했다.
“이제 하나하키는 의학적으로 병이 아니에요. 굳이 따지자면 정신심리학 쪽에서 다룰 수 있는 병이죠. 사와무라 씨 같은 환자들이 오면 항상 하는 말이 있는데.”
자리에 앉은 채 나를 보는 의사는 뻔하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경 쓰였지만, 아마 그 표정은 수많은 환자들이 나와 같았기 때문에 나오는 얼굴이라 짐작했다. 간호원은 내게 얇은 책자를 주고 진료실에서 나갔다.
“일단 좀 읽어 보세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시고요.”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제작되었는지 표지에 그려진 캐릭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큼직하게 들어간 글씨와 화려하게 색색으로 꾸며진 표지를 넘기자, 설명이 나왔다.
하나하키는 꽃을 토하는 병입니다. 신체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도 구역질이 나고 속이 메스꺼우며 구토 증세로 이어져 꽃을 토하게 됩니다. 이 증세는 신체가 아닌 심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 짝사랑이 끝나면 하나하키 증상은 사라집니다.
알고 있었던 정보를 읽으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의 힘으로 밝혀낸 것은 거기까지이며 왜 꽃이 만들어지는지 같은 사항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환자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건가.
토하는 꽃의 종류도 있었는데 흔히 일본인은 주변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벚꽃을 내뱉는 경우가 많단 말도 적혀 있었다. 사람에 따라 토하는 꽃도 다 다른가 본데 실제로 본 적 없는 꽃을 토한다든가 하는 사례도 있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무작위인 듯했다. 거기에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꽃의 상태로 그 사랑의 진행 정도를 알 수 있다는 말도 있었다.
증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방안은 약물 복용과 정신 치료가 전부였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짝사랑을 끝내는 것이었다. 이게 그냥 고백한다고 끝나는 일인가. ‘널 좋아해’와 ‘나도 네가 좋아’로 끝날 일이면 세상에 사랑으로 고민하는 사람 하나도 없게? 쿠로오에게 고백했다가 무슨 말을 들을지 상상해 보던 나는 부질없는 짓을 그만두고 책자를 내려놨다. 어느덧 테이블로 다가온 의사가 내게 말했다.
“책자에 다 설명되어 있긴 하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원하는 대로만 되나요? 그렇게 되면 사랑이고 마음이고 인간관계로 고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대부분 환자가 걱정하며 찾아옵니다만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닐 겁니다. 사와무라 씨도 잘 생각해 보세요. 굳이 그 사랑을 이룰 필요도 그렇다고 포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의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히 해결되기도 하죠.”
당신 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듣고 병원을 나왔다. 처방전을 들고 갔더니 약사는 덤덤한 얼굴로 약을 포장해 줬다. 항우울제와 심리안정제 등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하지만, 속은 다시 메슥거리기 시작했고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에 이르렀을 때는 구역질이 났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 빈속인데도 뭔가 넘어올 것 같았다. 가로수에 손을 집은 채 고개를 숙였다. 먼지가 뒤섞인 흙이 보였다.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2
“미안, 켄마. 이렇게 와 줬는데.”
“됐어. 쿠로, 몸 잘 챙기고.”
“잘 가.”
웃으며 인사를 마치자 곧 지하철 문이 닫혔다. 켄마는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펴 전화기 모양을 만든 뒤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 그 메시지를 읽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평일에는 보통 피곤하다며 잘 오지 않는데. 굳이 시간을 내서 보러 온 건 켄마 나름의 어리광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인영이 자그마한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하철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웃음을 거둘 수 있었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옴과 동시에 구역질이 시작됐다. 우욱…. 그동안 참았던 자신에게 칭찬이라도 해 주고 싶을 만큼 토기가 올라왔다.
켄마를 향해 다정히 흔들던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걸었다. 화장실까지 갈 수도 없을 것 같아.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근처에 있던 하수구로 향했다. 다행히 시간이 늦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몇 없는 사람들도 다 술에 취한 인간이라 여기는지 내게서 한두 걸음씩 멀어져 갔다.
차오르는 구토감. 알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지만 삼키려 애써 봐도 몸이 반응해 버린다. 위액이 올라올 것 같은 느낌에 꿀꺽 침을 삼켰지만 소용없었다. 입을 다물고 두 손으로 막아도 꾹꾹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오듯, 그것은 어김없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수구 위에 떨어진 꽃 위로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연분홍빛의 벚꽃을 보며 나는 입술을 훔쳐냈다. 서너 개의 꽃에 혓바닥에 붙은 꽃잎까지.
퉤. 침과 함께 다 뱉어 내고 나자 진정이 됐다. 어지러움이 아직 가시지 않아 토해 낸 옆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담배가 땡겨 주머니를 뒤적였는데 아까 켄마와 저녁을 먹고 계산한 영수증이 손에 잡혔다. 버젓이 찍혀 있는 2인분의 식사 금액에 나는 영수증을 구겨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하하… 진짜….”
자조 섞인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피고 싶어지면 입이 심심하지 않도록 상대해 주겠다’는 그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아니, 이러면 안 되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또 구토감이 치밀었다. 내 몸이지만 정말 한 대 때려 주고 싶다.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면 그뿐이라는 건가. 이제 와서 그런 게 용서받을 수 있겠냐고.
호흡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한 건 청소부가 처리해 주겠지. 먼지를 털어 내고 가방을 들었다. 일단 집에 가자. 가서 생각해 보자고. 치미는 감정과 토기를 억누르며 나는 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집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가방을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쓰러짐과 동시에 매트리스가 흔들렸고, 머리도 다시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하지만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제 슬슬 숨기는 것도 한계니까. 머지않아 켄마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까지는 그럭저럭 넘긴 것 같지만 이제 그 앞에서 웃는 것조차도 버겁다는 사실을 확실히 자각하고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올려 둔 진단서를 보자 그날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 애인이 있는데 토하는 건 제가 그 사람을 더 안 좋아한단 건가요?”
“그럴 수도 있죠. 쿠로오 씨가 다른 분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애인 분이 다른 분을 좋아하는 걸 수도 있구요. 둘 다일 수도 있죠.”
“하….”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를 보며 한숨을 쉬니 의사가 웃으며 답했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죠? 혹시나 증세가 심각해지면 상담과로 가시는 걸 추천해요. 하나하키 환자가 많아서 따로 전문 병원도 있고….”
“아뇨. 그건 두고 본 후에요.”
“쿠로오 씨. 지금은 조금 혼란스러울지 몰라도 빨리 인정하는 게 모두가 편해지는 길이에요. 요즘엔 쿠로오 씨처럼 애인이 있어도 하나하키를 앓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너무 자책하진 마세요.”
심각해지면 다시 오라는 말과 함께 병원을 나섰다. 아리송하다 여기던 감정을 병원에서 확인받고 나자, 확신했다.
이렇게 보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아마 사와무라겠지. 몇 주 전에 만났을 때부터 얼굴이 안 좋아 보이긴 했는데 뭘 잘못 먹은 건지 화장실을 들락거리다 결국엔 밥도 못 먹고 헤어졌다. 그 이후에도 괜찮냐고 여러 번 연락했지만 일이 바빠서인지 통화조차 못 할 때가 많았다. 이렇게까지 바쁜 적은 없었는데. 바빠서 못 만난다, 피곤하다는 단문의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사와무라가 날 피하고 있다는 생각은 커져만 갔다.
2. No smoking
담배 생산량이 줄면서 귀해진 담배 타치바나를 찾아 헤매다 만나게 된 쿠로다이 이야기.
점심시간을 맞아 빌딩 앞은 사람들로 복작였다. 식사시간이 겹치지 않게 빠르게는 11시 30분, 늦게는 1시부터 한 시간 동안으로 회사별 재량을 발휘했지만, 빌딩으로 둘러싸인 회사 밀집지역은 사람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굳이 몰려든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여름의 태양은 미칠 듯 쨍쨍히 기운을 내뿜고 있었기에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서둘러 식당으로 몰려가곤 했다.
떼를 지어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음식점이 아닌 다른 곳을 찾아 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있었다. 벗은 양복 재킷은 팔에 걸친 채, 반소매 셔츠에도 땀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는 남자는 이 거리 어딘가의 사무실에 앉아 고군분투하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답답함에 셔츠 단추도 몇 개나 풀어버린 쿠로오는 표정만은 사막 한가운데서 물을 찾는 사람 같았으나 지치지도 않고 움직였다. 시계를 힐끗 본 그의 얼굴은 기운 없어 보였지만 정말 물이라도 찾고 있는 걸까 생각될 만큼 걸음만은 빨랐다.
벌써 30분 지났잖아. 혼잣말로 중얼거린 쿠로오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목표로 하는 곳은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 점심시간 30분을 허비해 가면서 그가 찾아 헤매는 것은 담배였다.
최근 나라에서 시행한 국민건강을 도모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담배에 붙는 세금이 올랐다. 그 바람에 담뱃값은 한 끼 식사보다도 비싸졌다. 이제 약간의 돈을 담뱃값에 비유하는 건 무리였다. 흡연실에 드나들 때마다 ‘쿠로오 씨 부자인가 봐요’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답답했다. 나라고 금연 시도를 안 해 봤겠습니까.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가격이 오르고 담배 소비가 주춤하는 사이에 정부에서 금연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도 시작했다. 그렇게 흡연자들이 갈팡질팡 맘을 졸이고 있을 때 일본 담배산업주식회사는 생산 자체를 줄여 버렸다. 그나마 피던 사람들도 하나둘 줄어 갔고, 더 값싼 담배로 갈아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생산량 저하의 타깃은 몇 년 전에 출시되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담배로 좁혀졌다.
쿠로오가 타 버릴 듯한 날씨에도 돌아다니는 건 이런 이유였다. 타치바나. 출시된 건 쿠로오 테츠로가 17살이 되던 해였고, 담배를 피우기 전까지 그는 ‘타치바나’라는 담배가 있는 것조차 몰랐었다. 하지만 20살이 되자마자 들어간 대학에서 과 선배가 ‘한 대 필래?’라고 물은 것을 계기로 담배에 맛을 들였다. 처음 손을 댄 건 순전히 호기심과 멋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담배에서 맛을 찾다 보니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이것저것 종류별로 손을 대 보았는데 처음에 피웠던 ‘타치바나’만 한 담배가 없었다. 그 선배가 피우는 게 멋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네. 한 대 빌려 피는 게 제일 맛있었는데. 쿠로오는 잠시 떠오른 선배 생각에 머리를 저었다.
그냥 타치바나 말고 다른 걸 피우면 되는데. 쿠로오 역시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담배는 그가 원하는 맛이 안 났다. 그 맛이 아니면 피워도 핀 것 같지가 않단 말야. 빈손으로 담배 피는 시늉을 해 보던 그는 벌어진 손가락 사이를 보며 냉소했다. 아, 진짜 끊는 게 나으려나. 저 편의점에도 없으면 끊을까. 하지만 몇 초 안 가 쿠로오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담배라도 안 피면 그가 일 때문에 열 받아 죽을지도 몰랐다.
담배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면서도 끼니는 때워야 했기에 먼저 들렀던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두 개를 사 먹었다. 다 마신 물병은 쓰레기통에 던져진 지 오래였다.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쿠로오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좌우로 빼곡하게 들어찬 빌딩에 시야에 들어오는 하늘은 좁디좁았다. 담배를 핀다고 이 풍경이 변화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래도 한 대 태우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파란불이 켜지고, 그는 서둘러 목표 지점을 향해 갔다.
텁텁하고 뜨겁던 공기가 편의점 문을 넘는 순간, 가게 안의 차가운 공기로 바뀌었다. 환기조차 잘 되지 않는 시내 편의점의 공기가 시원할 리야 없었지만 적어도 피부에 닿는 느낌은 구원이라도 받는 것 같았기에 쿠로오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타치바나 안 들어와요?”
타치바나?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쿠로오는 카운터로 고개를 돌렸다. 알바생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쿠로오와 마찬가지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정장은 아니었지만 캐주얼한 복장이 직장인인 듯 했다. 최근 들어 이 회사밀집지역에도 자유로운 복장을 허용하는 기업이 늘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영업부서에선 꿈도 못 꿀 일이었기에 쿠로오는 부럽단 눈초리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안 들어오는 걸로 알아요.”
“아니… 뭐 가는 데마다 없으니….”
일개 편의점 알바생이 자세한 상황을 알 리가 없었다. 남자는 한숨을 푹 쉬더니 ‘수고하세요’ 한마디를 남긴 채 돌아섰다. 쿠로오는 문득 자신과 같은 처지인가 의문이 들어 방금 그 남자가 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어? 여기도 타치바나 없어요?”
그 질문에 출구로 향하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네. 없어요. 방금 저 손님도 찾으셨는데….”
실낱같은 희망으로 혹시나 찾아온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없다니 진이 빠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늘 타치바나를 구하려고 체크해 둔 가게는 거의 다 돌았는데. 쿠로오는 눈을 가렸다. 담배 하나 피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아무리 기호식품이라도 그렇지, 진짜….”
쿠로오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자신을 보는 남자를 봤다. 검은 눈동자에 시원하게 자른 짧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얇은 체크무늬 셔츠는 팔꿈치까지 걷어붙였고, 훤히 드러난 목덜미 뒤로는 땀이 흐르는 게 보였다. 말없이 그 두 눈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도 ‘타치바나’에 반응한 게 분명했다. 쿠로오는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 지금 들어보니까 타치바나 찾으시는 거 맞죠? 지금 그 담배 사러 편의점을 다 돌아다니고 있는데 이 일대 어디에도 없는 거 같아요.”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는 끄덕거리며 편의점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를 밀어 내며 달아오른 열기가 열어젖힌 문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히 가세요. 으레 하는 알바생의 인사였는데도 빨리 문이나 닫고 나가란 말로 들려와 쿠로오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뜨거움에 입을 닫았던 남자는 편의점을 나와 입을 열었다.
“그쪽도 타치바나만 피나 봐요.”
‘그쪽도.’ 짧은 머리의 남자 역시 동병상련을 반기는 눈치라 쿠로오는 그의 옆에서 발걸음을 맞췄다.
“네. 다른 건 맛이 안 나지 않아요?”
“맞아요. 그 맛이 아무 데서나 나는 게 아니잖아요.”
“잘 아시네.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하며 나가는 것도 그것만큼 시원한 게 없거든요.”
회사 동기들한테 피워 보라고 권유했다가 불만 붙인 담배를 다시 받았던 적이 있었다. ‘이거 너무 세잖아’, ‘쿠로오 생각보다 독하네’와 같은 반응이었기에 타치바나를 선호하는 흡연자를 찾기는 쉽지 않았었다.
“취향이 맞나 봐요. 다른 사람들은 다 너무 강하다던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자 남자 역시 웃기 시작했다. 아마 같은 처지였으리라고 쿠로오는 짐작했다. 뒷주머니에 꽂혀 있는 지갑과 휴대폰. 점심을 반납하고 타치바나를 찾으러 나온 사람이겠지. 제멋대로인 짐작이었지만 쿠로오는 동병상련에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막막해 한숨이 났다. 회사로 돌아가야 하나. 담배도 못 샀는데.
“하…. 담배 덕분에 겨우 버티는 건데, 나라에서 담배도 맘대로 못 피게 하니.”
그때 남자가 길 건너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도 없으니 그 다음은 두세 블록 더 가서 있는 가게 하나밖에 안 남았네요.”
“어? 편의점이 하나 더 있어요?”
검색했을 때 그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미 사전조사를 마치고 나왔던 탓에 쿠로오는 의아하단 얼굴을 했지만,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아뇨. 재개발지구 변두리에 허름한 구멍가게 하나 있어요.”
재개발지구라면 이 근처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이 갈 일 없는 장소였다. 근처는 이미 빌딩이 쌓이고 상업지구로 넘쳐 나는데 그곳만은 상업지구가 들어서기 전에 개발되었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좀 더 기다렸다가 보상금을 받기 위해 벼르고 있다는 풍문은 영업부 부장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부장 역시 그 지구 주택에 사는 사람이었다.
“전부 다 돈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거기에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없으면 저녁에 술이라도 한잔 해야겠는데요.”
이 땡볕에 두어 블록을 더 걸어야 한다는 건 절망적이었지만, 그래도 혹시 타치바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 남자는 함께 걷기 시작했다. 혼자라면 회사로 돌아가길 택했겠지만 길동무가 생겼다는, 자신과 취향이 같은 누군가가 있다는 반가움에 쿠로오는 아까와 달리 조금 웃고 있었다.
***
오는 길에 남자는 담배를 찾느라는 아니었지만 한두 번 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과연 그 말대로 도착한 가게는 그곳에 가게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면 찾을 수도 없을 것 같이 작고 허름했다. 그나마 옆에 지어진 건물은 주택단지가 들어설 때 같이 지어졌는지 쓰러질 것 같진 않았는데, 대강 지붕을 얹은 판잣집 너다섯 개가 붙어 있는 가게는 쿠로오가 마음먹고 주먹 한 번 휘두르면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앞장선 남자가 미닫이문을 밀자 드르륵 소리가 났다. 그나마도 열리다가 어딘가에 끼인 건지 반쯤 열리다 멈춰 버려 그는 몸을 옆으로 돌려 안으로 들어섰다. 쿠로오도 남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냥 지나가기에는 입구가 너무 작았다.
3. Someday
쿠로오의 아들, 유치원생 쿠로오 시로를 혼자 키우는 사와무라 다이치 이야기.
나른한 오후 터져 나오는 하품에 입을 가렸다. 추운 날씨에 하얀 입김이 나왔다. 사람들을 뱉어 낸 마을버스는 탈탈거리는 소리를 내며 언덕을 올라갔다. 시간이 이른 탓인지 출근할 때 터질 것 같던 버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산했다. 팔을 돌릴 때마다 어깨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기지개를 켜도 피곤함은 가시질 않았다. 몸을 쭉 필 때마다 한기는 틈을 찾아 온몸으로 들어왔다. 빨리 집에 가서 코타츠 안에 들어가고 싶다. 늘어지고 싶은 마음도 생각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유치원에는 아슬아슬하게 딱 맞춰 도착했다. 모습을 감춘 지 5년, 얼굴이 가물가물해질 지경인 그 녀석을 떠올릴 수 있는 건 똑 닮게 생긴 아이 때문이었다. 한쪽으로 이상하게 뻗친 검은 머리나 시큰둥해 보이는 얼굴까지 그 녀석 유전자를 빼다 박았다 할 만한 그 모습에 나는 손을 흔들었다.
“시로.”
유치원에서 나오던 시로는 나를 발견하고는 급히 달려왔다. 뒤에서 지켜보던 선생님이 천천히 가라고 말렸지만, 시로는 멈추지 않고 달려와 내 앞에 섰다. ‘아빠’ 하고 나를 부르는 아이는 활짝 웃고 있었다. 훌쩍 커 버린 아이를 안아 드는 것도 이제는 조금 버거워졌기에 나는 무릎을 굽혀 앉아 그와 눈을 맞췄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있었지?”
“응.”
인사를 하려 일어섰을 때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아버님,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흔히 사람들이 시간이 있느냐고 물을 때는 곤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음으로 선생님과 면담했을 때는 시로가 유치원에서 뭐라도 잘못한 건 아닌가, 애한테 문제가 있는 건가 덜덜 떨면서 선생님을 기다렸지만 이것도 몇 년째 되다 보니 익숙해졌다. 큰 문제는 아닐 테고, 늘 있는 이야기 중 하나일 거다. 시로가 오늘 반 친구와 싸웠다거나 어떤 부분에 관심을 보인다든가 하는 흔한 이야기.
자리에 앉아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치원 사무실도 회사와 별다를 것은 없었지만, 곳곳에 만들고 있는 수업자료들이 눈에 띄어 답답함을 덜었다. 시로를 다른 선생님에게 맡기고 온 선생님은 커피 한잔과 함께 이야기를 꺼냈다.
“시로가 다른 친구들보다 어른스러워요. 그런데 너무 어른스러운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네요.”
시로가 직접 이름을 쓴 스케치북을 넘기며 선생님이 말했다. 회색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아마 나겠지. 다이치 아빠라고 적힌 삐뚤빼뚤한 글씨도 보였다. 그 옆에는 방긋 웃고 있는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테츠로 아빠. 둘 사이에는 시로로 추정되는 아이가 두 남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림 옆에는 글도 써져 있었는데, 아마 오늘 나를 부른 이유는 이것 같았다.
‘나도 얼른 커서 아빠를 도와주고 싶다. 테츠로는 혼내 줄 거야.’
시로가 어떤 마음으로 이 그림을 그렸는지는 예상이 갔다. 아빠 둘 사이에서 크다가 친아빠가 사라진 상황을 몇 살 먹지도 않은 어린애에게 받아들이라는 건 가혹한 일 아닌가. 반 선생님이 따로 이야기를 꺼낸 건 집안의 사정을 다 알고 있어서였다. 사와무라 다이치, 쿠로오 시로. 이미 대강의 사정은 유치원 내에서도 파다히 퍼져 있을 게 뻔했다. 물론 선생님이야 비꼬려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짧은 면담이 끝나, 시로의 손을 잡고 유치원을 나섰다. 나보다도 먼저 고개를 숙인 녀석은 선생님을 향해 팔을 크게 흔들었다. 내일 보자, 시로. 상냥한 선생님의 목소리에 나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신경 써 주셔서 고맙다는 의도가 전달이 됐는지 선생님은 살펴 가시라며 웃었다.
***
‘혼자 힘드시겠지만….’
진심인 걱정에서 우러난 말이었겠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시로가 커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가 있었고 지금 이 아이의 아빠는 나뿐이니까.
‘아버님이 평소에 행동하시는 것 하나하나가 아이한테 영향을 미쳐요. 물론 사와무라 아버님이 쿠로오 아버님을 안 좋게 말씀하시진 않겠지만…. 테츠로 아버님을 싫어하게 될까 봐 조금 걱정이네요.’
산등성이에 노을이 간신히 걸려 있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탓에 회사에서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고 있었지만, 다른 사원들에게 조금 눈치가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나 아니면 봐줄 사람도 없는걸. 정작 친아빠란 놈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으니. 그래서 내가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시로에게는 다정히 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잘해도 한계가 있는 건가. 에휴…. 시로가 유치원에 다니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쿠로오였기에 애 앞에서는 테츠로 흉을 본 적은 없는데. 말이 아니어도 행동에서 티가 난다는 건가.
아, 그러고 보니 하나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긴 하네.
시로가 한참 말을 배울 때였다. 모르는 게 있으면 재깍재깍 ‘뭐야?’, ‘왜?’라고 묻기 시작했을 때. 시로는 넘어져서 까진 무릎에 밴드를 붙이고 왔다. 소독이며 약까지 선생님이 다 챙겨 줬지만, 며칠간은 계속 밴드를 붙여야 했다. 면봉으로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를 때마다 시로는 아프다며 내 팔을 붙잡았다. 약 안 바르면 더 느리게 나아. 그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치료가 끝나길 기다렸다.
다 됐다는 내 말에 시로가 물었다.
‘있잖아, 아빠. 아빠도 이렇게 아팠던 적 있어?’
‘그럼, 당연히 있지. 요리하다가 종종 손 다치기도 하고….’
집안일을 맡은 지 몇 년이 됐는데 여전히 다친다는 게 조금 부끄러워 볼을 긁적였다. 그러다 갑자기 시로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나는 손을 멈췄다.
‘테츠로가 아프게 했어?’
그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 짐작은 가지 않지만, 시로는 손을 뻗어 내 볼을 어루만졌다. 당황스러움을 지울 새도 없이 시로는 말을 이었다.
‘상처는 마음에 난 상처가 제일 아픈 거래. 책에서 봤어.’
아이는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었다.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나는 여기가 제일 아팠어. 아빠가… 테츠로가 아프게 해서.’
나는 말없이 시로를 끌어안았다. 이 작은 어린아이에게 어떤 상처를 준 걸까. 테츠로가 사라졌을 때, 네가 얼마나 아팠을까.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고, 시로가 잘 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잘하고 있다고 자만했던 내가 싫었다.
그때의 일을 유독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건 시로의 얼굴 때문이었다. 시로는 웃고 있었지만 시무룩해 보였다. 차라리 우는 게 더 나을 정도로. 아이는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이후에 나는 시로에게 울지 말라는 말은 더 하지 않았다. 괜스레 내가 더 울고 싶어져 눈가를 주물렀다. 애는 애답게 울면 되는데. 눈을 비비다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숙이자 검은 눈망울이 빤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 되지, 안 돼. 애 앞에서 이러면. 고개를 내젓고 아이를 보며 물었다.
“시로.”
“응?”
“갖고 싶은 거 있어?”
“갖고 싶다고 하면 가질 수 있어?”
“아빠가 줄 수 있는 거면.”
“됐어. 난 아빠만 옆에 있으면 돼.”
‘테츠로 말고, 사와무라 아빠 말이야.’ 덧붙이는 그 말에 쓴웃음이 났다. 아주 어렸을 때는 쿠로오가 옆에 있긴 했는데, 시로는 테츠로에 대해 많이 기억하지는 못했다. 대신 진짜 자기 아빠는 따로 있고, 나는 자기를 돌봐 주는 아빠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나마 몇 장 찍어 둔 사진으로 아빠가 네 옆에 있었다고 이야기해 준 게 전부였다. 테츠로가 사라진 탓에 더 내게 기대는 건 아닐까. ‘사와무라가 아니면 날 돌봐 줄 사람이 없어.’ 그런 생각에 내게 더 기대는 건지도 모른다. 아무리 내 애가 아니라도 널 내 버릴 생각은 없는데. 붙잡았던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도 시로만 있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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