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배구

하이큐 전력 60분 쿠로다이 꽃

중독된 깡 2014. 9. 1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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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사와무라.



처음에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병 자체를 못 믿은 건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는 카게야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고, 사와무라 자신이 꽃을 토한 적도 있었다. 그때의 대상은 평범한 여자였지만. 하나둘 떠오르는 추억에 휘휘 손을 내저으며 기억을 쫓아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다이치의 손짓에 옆자리에 서 있던 여자가 몸을 움츠리며 그를 피했다. 아, 죄송합니다. 바로 사과하는 다이치의 모습에 여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다이치는 하하 웃다가 곧 한숨을 내뱉었다. 뭐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연애 경험은 제법 있는 편이었다. 대학교에 온 후로는 가끔 얼굴을 내밀거나 배구는 취미로 하는 정도였고, 대학 생활에 집중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럴 기회가 생겼다. 다이치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만큼이나 책임감이 강하다거나 성실하다거나 하는 면들을 보고 주변에 사람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인간 중 대다수가 조별 과제에 무임승차하려는 인간들이었지만… 다시 손을 내저은 다이치는 손목시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벅벅 뒤통수를 긁던 그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약속장소 근처. 다이치는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을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여어-.”


찾을 것도 없이 카페 앞에는 약속상대가 서 있었다. 다이치는 별 반응 없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며 쿠로오를 훑었다. 말끔히 차려 입은 흰 셔츠와 바지에 가볍게 걸친 가디건까지. 아프다더니, 평소랑 똑같잖아.


“진짜 아팠어.”


그 눈초리에 쿠로오가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손에는 왠 꽃 한 송이가 쥐어져 있었다. 믿지 못하는 다이치를 위해 꺼내 들었던 게 분명했다. 알 바 아닌데. 네가 아프든 말든. 그렇게 쏘아붙이려던 다이치는 아무 말 없이 구석진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돌아가자 한순간 테이블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양손으로 나오는 꽃을 받아낸 쿠로오는 조용히 테이블 위에 꽃을 내려두었다. 다이치는 어젯밤 쿠로오의 전화 후에도 머리가 터져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테이블 위에는 카페에 들어오는 동안 쿠로오가 뱉어낸 꽃들이 어느새 10송이도 넘게 늘어 있었다. 그렇게 좋냐. 그런 물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 다이치는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일단 어제 처음으로 아프다는 이야길 꺼냈다는 건 이게 어제오늘 계속된 일은 아니라는 거겠지. 언제부터? 일주일? 한 달? 꽃을 토하는 것이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니기에 다이치는 제가 병에 걸렸던 때를 떠올리며 구토감을 상기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그건 그다지 유쾌한 일만은 아니었다.

거기에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녀석이 말을 꺼낸 건 다른 속셈이 있다는 말이겠지. 다이치는 싱글싱글 웃고 있는 쿠로오의 얼굴에 이유 없이 한 방 먹여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을 꺼낸 다이치의 첫 마디는 이거였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사와무라 군은 어떤 생각인가 싶어서.”


어떤 생각이냐니. 내 마음이 어떤가 떠보려고 불렀다는 말이냐. 다이치는 그를 쏘아보며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얹었다. 그리고 양손을 붙잡아 머리를 기댔다.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너 코즈메랑 사귀고 있지 않았어?”

“정리했어. 어제 바로.”

“너네 몇 년 사귄 거 아니었냐?”

“같이 있었던 건 더 오래됐으니까. 말 한마디로 전해지는 것도 있는 거야. 그렇다고 켄마랑 인연을 끊을 것도 아니니까. 잘 됐지, 뭐.”

“…….”


탐탁지 않다는 그의 눈초리에 쿠로오가 말을 덧붙였다.


“코즈메도 아마 따로 마음에 뒀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고.”

“…쉽게 정리가 되네.”

“근데 난 사와무라 군도 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쿠로오는 자연스레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미쳤냐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대답은 의외였다.


쿠로오의 이야기에 다이치는 묘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어젯밤 전화를 끊고 나서 지금까지. 혹시나 좋아하는 대상을 착각한 게 아니냐는 물음은 통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떠올릴 때가 아닌 사와무라 다이치를 떠올릴 때 꽃을 토하게 된다고 쿠로오가 못을 박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가끔 꽃을 토하는 게 멈추기도 한다-는 쿠로오의 말은 뭔가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쿠로오의 말은 결국 사와무라도 나를 조금은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데 자각하지 못한 것뿐인 게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다이치는 턱을 괴었다. 내가 쿠로오 테츠로를 좋아한다라.


좋아하지 않을 건 또 뭔가 싶었다. 최근 만나는 무리야 여럿 있었지만, 대학교 동기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배구나 카라스노 고교와 관련된 사람들이었고 모임에 나가도 우중충한 남자들이 전부였다. 동기 중에 특별히 연애감정이 오고 가는 사이도 없었고, 따로 만나는 여자도 없었다. 그야, 아직 누군가를 좋아하기엔 역부족이니까. 일만큼 애인을 신경 쓸 여유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취업 후에는 누군가와 사귄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만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거의 매주 만나고 있고 만나고 싶을 때면 부담 없이 전화를 해서 상대를 부른다. 그저 편한 친구로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상대가 동성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분명 ‘곧 사귀겠네’란 말을 들을 만한 사이였다. 그래도 왜 하필 이 녀석이지. 차라리 스가나 아사히가 더 귀엽고…. 친구들을 떠올리던 다이치는 다시 버스에서처럼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 녀석들은 그럴 사이가 아니니까.


제 행동을 뻔히 지켜보고 있는 쿠로오의 눈빛에 다이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 수긍이 빠른데?”

“어쨌거나 네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니고.”

“아, 이제 켄마는 괜찮아. 깨끗하게 정리했으니까. 너한테 말한 이후로는 그렇게 토한 적 없어.”

“그럼 아픈 거 아니니까 괜찮겠네.”

“아니, 그건 아니지. 몸은 괜찮아도 내 마음이 이렇게 찢어지는데. 사와무라 군.”


가슴을 감싸며 아픈 척 연기를 하는 쿠로오의 모습에 다이치는 팔을 뻗어 주먹을 날렸다.


“웃기고 있네.”


굳어졌던 얼굴에 웃음이 어리는 것을 보고 쿠로오는 조용히 웃었다. 사와무라라면 진지하게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고민하는 걸 굳이 드러내지도 않을 거고, 쿠로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작은 이야기라도 농담으로 넘기지 않고 생각해 주겠지.


“그럼 우리 사귈까?”

“…….”


쿠로오의 말에 웃던 다이치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그의 시선은 다시 테이블 아래로 향했다.


“사와무라 군. 사람이 말을 했으면 들었는데도 못 들은 척하는 건 좀 아니지.”


너무한다는 그의 손짓에 다이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서 그래.”

“어떤 게?”

“네가 진심인지. 또 나는 어떤 생각인지.”


꽃을 토한다는 건 그냥 아이들 장난이라고만 생각할 수 만은 없는 일이었다. 사람에 따라 정도나 방법에 차이는 있었지만, 심한 사람들은 사랑에 굶주려 죽어가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사와무라가 받아주지 않아도 쿠로오가 손목을 긋거나 옥상에서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고백한 사람의 마음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럼 넌 내가 좋아해, 사귀자 하면 바로 OK할 수 있는 거야?”

“글쎄.

“이걸 그냥….”

“그러니까 생각해 봐. 그렇게 고민하는 사와무라 군도 좋으니까.”

“진짜 몰라서 묻는 건데 진심이지?”

“어떨까나.”

“…….”

“진심이야, 진심. 아, 그렇지만 대답은 빨리 듣고 싶으니까….”


때마침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라며 테이블에 찾아온 종업원 덕분에 대화가 끊겼다. 남자 둘 앞에 커피잔을 내려둔 종업원은 ‘맛있게 드세요’ 하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떴다. 종업원이 자리에서 사라지자 쿠로오가 다이치의 머그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다 먹으면 말해 줘.”

“싫다고 하면.”

“그럼 더 반하게 만들어야지.”

“뭐야, 그거 선택지가 있긴 한 거냐.”

“있어. 1번 쿠로오한테 반한다. 2번 쿠로오를 좋아한다. 3번 쿠로오를….”

“됐어, 임마.”

“알았지, 사와무라? 대답해야 해?”


아이같이 보채는 쿠로오의 모습에 다이치는 조용히 잔을 들었다. 차가운 가을바람에 식었던 몸에 따뜻한 커피가 들어갔다. 쿠로오 역시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분홍빛 꽃송이들을 보며 다이치는 생각했다. 아마 어제 그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초조해하는 쿠로오를 보고 싶으니, 지금은 조용히 있자. 호로록 말없이 커피를 마시는 두 사람 사이에 꽃향기가 번져 나갔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