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집을 나서는 발길이 다 그렇지만, 소복이 쌓인 눈이 햇빛을 반사하면서 더 큰 빛을 발해 파괴력을 더했다. 눈부셔. 빨리 나오길 잘했네. 숨 쉬는 것만으로도 희뿌연 입김이 새어나온다. 겨울. 12월에 들어서면서 이제부터 겨울이라고 외치듯 몰아치는 추위에 옷깃을 여몄다.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냉기가 발을 타고 끝도 없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아, 춥다.
문을 열기 전까지 계속 곧 있을 시험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눈길을 보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 그대로 머릿속에 들어가 백지가 된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아직 1학년이고 끝난 시험을 생각하면 장학금은 어렵지 않게 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남은 하나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라 부득부득 밤을 새웠다. 옆에 있던 쿠로오가 뒤척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움츠렸던 몸을 꼿꼿이 펴자 허리에서 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 망할. 갑작스러운 통증에 허리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내자 뒤에 있던 녀석이 나를 불렀다.
"사와무라, 아파?"
돌아보자 히죽거리는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기분 나빠.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렇게 열 올릴 거 없는데 열심히 하니까 나도 꼭 하고 싶어져서 그랬지."
배를 긁으며 하품하는 녀석은 집구석에 처박혀 있던 백수처럼 보였다. 녀석은 3일 전 시험이 끝났다. 끙끙거리는 나와 달리 쿠로오에게 시험은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러고도 성적은 그다지 나쁘지 않단 말이지. 운동부라 점수를 잘 주는 건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노려보고 있으려니 쿠로오가 손가락을 튕겼다.
잠깐만 기다려. 방 안으로 들어간 그는 금세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네코마 유니폼처럼 빨간색의 목도리였다. 가까이 다가온 쿠로오가 내 목에 그 목도리를 둘렀다. 추위 앞에 훤히 드러났던 목이 한결 따듯해졌다. 그런데 이거 선물 받은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해도 되는 건가. 목도리와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자 쿠로오가 웃으며 장갑을 건넸다.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따뜻하게 하라고 받은 거고. 사와무라가 감기라도 걸리기라도 하면 나도 걸릴 거 아냐? 예방하는 게 중요한 거지."
키스하고 뒹굴고 하면 내 감기도 제게 옮아갈 거란 당연한 발상에 기가 찼다. 대꾸하진 않았다. 사실이니까. 지난여름 방학 알바처에서 감기를 얻어 왔을 때 꼬박 일주일을 앓았었다. 감기 걸렸을 땐 몸을 뜨겁게 해야 한다면서 이 녀석이 몸을 겹쳐 왔다. 전혀 효과는 없었던 것 같지만. 다 낫고 나니 이번엔 쿠로오가 옮았던 기억이 생생했다.
장갑 낀 손을 뻗어 쿠로오의 배를 쳤다. 그때 고생했던 기억에 약간의 분을 더한 주먹질이었다. 녀석은 억 하는 소리를 냈지만,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고개를 저었다. 넌 진짜...
"갔다 온다."
손잡이를 붙잡은 채 말하자, 쿠로오가 나를 불렀다.
사와무라.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서자 녀석이 입을 맞췄다. 가볍게 떨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입안까지 들어와서는 정신없이 혀를 굴렸다. 어제 그렇게 해놓고 또 하고 싶냐. 징그럽다 느끼면서도 밀쳐야겠단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이미 녀석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잘 보고 와."
변함없이 웃는 얼굴에 떠오른 일을 말했다.
"청소나 잘하고 있어."
"시험 끝나면 데이트하자."
제대로 듣기나 한 건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오는 데이트에 코웃음을 쳤다.
"집안일 다 해 놓으면."
조건을 내걸자, 쿠로오는 두 손을 모으며 받든다는 시늉을 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더 있다간 시험 전에 훑어볼 시간도 빼앗길 것 같아 문을 닫았다.
걸을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첫눈. 작년 겨울엔 센터시험에 정신없었는데 올해는 1월쯤이면 여유롭겠지. 아르바이트는 계속하고 자격증도 준비해야겠지만. 정류장까지 가는 그 잠깐 사이에도 바람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숨을 크게 쉬지 않아도 찬 공기가 직접 몸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춥지는 않았다. 온기는 그가 챙겨준 옷에, 목도리에, 장갑에 전부 담겨 있었다.
얼어붙은 길 위로 조심히 발을 내디뎠다. 숨을 내쉴 때면 하얗게 나온 김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것만큼이나 마음도 가벼웠다. 노력한 만큼 충분히 결과는 나올 것 같아. 이유 없는 확신에 발걸음 역시 가벼워졌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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