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한 번도 보인 적 없었던 것 마냥 어두컴컴했다. 살짝 머리도 아팠고 입안에선 피 맛이 났다. 혀로 입술을 핥으니 터진 듯한 상처가 쓰라려 왔다. 그의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서 보이기 시작한 건 테이블 하나와 구석에 쌓인 의자 몇 개였다. 창고 같아 보이는 공간에는 구석마다 캐비닛이며 연장들도 보였다. 여긴 심문실인가. 카라스노에 있는 그곳과 비슷하단 생각에 다이치는 바닥을 봤다. 컴컴한 와중에도 번들거리는 빛이 보여 저건 필시 핏자국이라 짐작했다.
손은 등받이 너머로 묶여 있었고 다리는 의자에 묶여 있었다. 몸을 움직여 곳곳에 숨겨두었던 흉기들을 찾았지만, 이미 다 회수해 간 건지 몸에 있던 쇠붙이는 전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깜깜한 한구석에 손잡이가 있는 문이 보였다. 나갈 수는 없겠지. 들어오는 놈이 한 명이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제대로 상대할 수 없다. 카라스노에 잡혀 온 놈들이 그랬듯, 묶인 채로 어설프게 저항했다간 된통 당하기 일쑤였다. 벽에 부딪혀 의자를 박살 내는 수도 있었지만 그런 소리가 나면 밖에서 경비를 보던 녀석들이 달려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떡해야 할까. 잡혀 오기 전 상황을 떠올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었다. 다이치는 땅이 꺼져라 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될 거라는 것도 알고는 있었는데. 진작에 끝내지 못한 내 잘못이다. 자신을 향한 비난과 질책을 쏟아내며 그는 땅을 보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이치는 인상을 찌푸리며 발소리를 들었다. 하나, 둘. 두 명이 들어오고 나서 문은 곧 닫혔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상대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중 한 명은 다이치가 예상했던 그 사람이었다.
“아, 사와무라군. 깨 있었네?”
달깍, 스위치를 올리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있던 전등이 켜졌다. 그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선 노란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다이치가 아는 사람이었다. 코즈메. 코즈메 켄마다. 금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까지 들었던 정보와 같았다. 네코마의 보스. 체격은 왜소해 보였으나 저보다 덩치 큰 사람을 한 방에 날려버리기로 유명한 놈이었다. 한순간의 깜빡임도 없이 다이치를 보는 그의 시선에 다이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켄마. 앉아서 기다리라구.”
미동도 없던 그를 붙잡아 이끈 것은 검은 머리 남자였다. 쿠로오는 켄마의 어깨를 잡아다 먼지를 털어낸 의자에 앉혔다. 그의 행동을 보면 보면 틀림없이 네코마의 주축임이 분명했다. 보스를 앉힌 쿠로오는 뒤돌아서서 다이치를 바라보았다. 빙그레 웃는 그 얼굴이 평소에 히죽거리던 얼굴과 같아 다이치는 한 대 때려주고 싶단 생각을 했다. 묶여 있지만 않았다면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을 터였다.
오히려 다행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쿠로오의 찡긋 눈짓했다. 네코마의 보스가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오른팔이라는 작자가 내게 사인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둘의 관계가 코즈메에게 들통 난다면 어느 쪽도 무사할 거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 우리 얘기 좀 해볼까, 사와무라 군?”
“당신이랑 할 얘기 없어.”
“우리가 알고 싶은 건 별거 아냐. 그냥 카라스노에 대한 거 조금?”
“털어봐도 아무것도 안 나올 거다.”
“카라스노 보스는 어디 있지?”
다이치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네코마 정보력도 별거 아니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손을 날렸다. 찰싹하고 맞은 뺨에 빨간 손자국이 남았다. 이 새끼, 진짜 쳤어. 켄마는 뒤에서 쿠로오의 심문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직접 움직이진 않겠지. 다행인 건지, 아닌 건지. 다이치는 울리는 머리를 진정시키려 고개를 숙였다.
“다음은 주먹이야, 사와무라 군.”
쉴 새도 없이 다이치의 턱을 들어 올린 쿠로오는 웃는 낯으로 다시 그에게 물었다.”
“말해. 어디에 빼돌렸어.”
“하… 보스가 누군지도 모르는 주제에 잘도 말하네.”
“그러니까 사와무라 군한테 이렇게 부탁하는 거잖아.”
“부탁? 이걸 지금 부탁이라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엔 주먹이 날아왔다. 불시에 맞은 다이치는 얼얼한 데에 이어 으득 하고 부러진 소리에 침을 뱉었다. 입안에서 나온 내용물에는 이와 함께 피가 섞여 있었다. 아, 씨발…. 작작할 것이지. 저 노란 눈 앞에서 적당히 하다간 금방 들켜 버릴 거란 건 다이치도 알 수 있었지만, 얄짤없이 온 힘을 실은 주먹은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돼. 사와무라 군.”
아, 그래. 그럼 입을 다물면 어떻게 될지가 더 궁금한데. 다이치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입을 열지 않으니 쿠로오로서는 할 수 있는 행동이 하나뿐이었다. 뺨을 때리는 것에서 시작해서 주먹질로 명치 부근과 배를 강타한 것은 물론 발길질 역시 서슴지 않았다. 방 안에 있던 각목과 쇠파이프 등으로 팔과 다리를 내리쳤고, 바닥에 엎어진 그를 발로 짓밟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폭력에도 다이치는 입을 꾹 다문 채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과연. 침대에서 참던 것도 끝까지 황소고집이었으니까. 쿠로오는 제 얼굴에 튄 피와 땀을 닦으며 부러진 각목을 내던졌다. 그리고 멀쩡한 각목을 집어 들었다. 잡아든 각목은 다이치의 머리를 향해 있었다. 꼿꼿이 고개를 쳐든 채 저를 바라보는 다이치의 눈에 쿠로오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미안. 그의 입모양을 읽으며 다이치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나쁜새끼.
“쿠로, 그만.”
얼마나 지났을까. 다이치가 정신을 잃은 후에도 쿠로오는 계속해서 그를 구타했다. 기절한 척하는 건 아닌지, 흔들어 깨우고 발로 찬 것은 물론인데도 인질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켄마의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춘 쿠로오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도통 입을 안 여네.”
“더 하다간 죽겠어.”
“죽을 정도로 패진 않았어.”
남자는 그의 말에 한숨을 쉬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향하는 그의 행동에 쿠로오 역시 급히 뒤를 따라 나섰다.
“오늘 쿠로 이상해.”
“뭐가?”
“평소보다 더 폭력적이야.”
켄마는 가늘게 뜬 눈으로 쿠로오를 흘겼지만, 그는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으며 웃었다.
“귀찮긴 하지만, 줄곧 쫓던 놈들이니까. 이 손으로 끝내고 싶어서.”
“실수라도 죽이면 곤란해. 소중한 인질이니까. 쿠로가 잘 맡아 줘.”
얼굴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나야, 나.”
퉁퉁 부은 눈을 채 다 뜨기 전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이치는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저를 쥐어 팼던 그 남자였다.
“뭐하는 거야.”
“괜찮아. 여기 아무도 없어. 켄마랑 나만 가끔 쓰는 방이고. 방음도 완벽해. 경비도 잠깐 쉬고 오라고 보냈고.”
“그런 것치곤 핏자국이 사방에 낭자해 있는데.”
“하하, 많이 죽였으니까.”
다이치는 퉁퉁 부은 얼굴로 쿠로오를 보았다. 정신을 잃기 전 저를 때렸던 그놈과 지금 눈앞에서 저를 치료하겠답시고 약을 바르고 있는 놈은 같은 인물이었다. 맞았던 온몸이 비명을 지르듯 아팠기에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쩔 수 없었다. 오른팔인 이 녀석이 인질을 맡은 것 역시 다른 녀석에게 당하는 걸 보고 있느니 제 손으로 하겠다는 생각에서였을 거다. 쿠로오가 카라스노에 붙잡혀 왔어도 마찬가지였겠지. 다이치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알고 있는데도 상처에 스며드는 소독약은 쓰라렸고, 그가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얼마든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후볐다. 서로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자신도 똑같이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시작할 때부터 그만둬야 한다는 걸 알았는데 왜 이제까지 이 녀석을 살려뒀지. 뒤늦은 후회에 다이치는 몸을 늘어트렸다. 밧줄을 느슨하게 한 덕분에 팔,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지만 한참을 두드려 맞은 탓에 정상적으로 걷기는 조금 힘들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보이냐? 존나 무자비한 새끼.”
“미안. 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의심 산 건지도 몰라.”
“…조그만 게 무섭긴 하더라.”
“켄마가 싸우는 거 아직 한 번도 못 봤지? 굉장하다고. 괜히 보스가 아니니까.”
“…….”
곳곳에 멍이 든 얼굴을 들여다보며 쿠로오는 약이 든 상자가 꾸깃꾸깃 구겨지도록 꼭 쥐었다.
“다이치.”
“뭐.”
“도망갈까?”
어느새 뺨에 닿은 손이 부드럽게 그를 어루만졌다. 쿠로오가 모를 리 없었다. 도망친다 한들 그 끝이 해피엔딩은 아닐 것이고, 다이치 역시 ‘그래, 도망가자’고 말할 리도 없다는걸.
“다 죽을 일 있냐.”
“그럼 어떡해야 할까.”
“이제 생각해야지.”
새어 나오는 한숨 끝에 입술이 겹쳐졌다. 입안 곳곳 역시 터지고 이가 나가 성한 곳 하나 없었다. 평소 같으면 거친 키스로 그를 몰아붙였을 텐데, 입안에 침범한 쿠로오는 그를 팰 때만큼 적극적이지 못했다. 다이치를 휘젓는 쿠로오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답지 않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어 다이치는 들어 올리기도 힘든 팔로 쿠로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네 탓이 아냐.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말없이 주고받은 눈빛이 전해졌는지 쿠로오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맞췄다.
만약 여기서 탈출할 수 있다고 하면 쿠로오와 어떻게 입을 맞춰야 할까. 이대로 잡혀 있으면 카라스노에서 구하러 올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신세를 지고 싶진 않고. 차라리 쿠로오 말대로 도망칠 수 있다면….
이룰 수 없는 희망을 품은 채 두 사람은 서로의 안타까움을 끌어안고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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