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라 소설 '그래도, 살아간다' 전연령가, A5, 무선, 58p, 6,000원 (페이지는 늘어날 수 있으며 늘어나도 가격은 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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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인포
신아라 소설 '그래도, 살아간다'
글: 깡 표지: 제이
줄거리
고3 마지막 인터하이가 끝난 시점. 가을이 다가오는 와중에 아라키타는 이즈미다의 입원과, 학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후쿠쨩의 갑작스런 유학 등으로 일상에 이상 전조를 느낀다. 편의점에 다녀오다 목격한 사건 이후 무언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아라키타가 집에 도착하자 TV에서는 미국의 중대발표가 나온다. 사람을 어떤 한 가지에 미치게 하는 그 바이러스는 발생 원인도 감염 경로도 모든 것이 인간이 알 수 없는 것투성이라 밝힌 발표에 전세계는 혼란에 빠져 마비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 한 줄 요약 세계적으로 퍼진 바이러스 때문에 고민하고 방황하는 아라키타의 이야기
+ 책 설정상 하코네 부원들의 본가는 모두 하코네에 있습니다(__)
알람을 껐을 때는 항상 일어나던 그 시간이었다. 창밖을 보니 늦더위가 한창인지 쨍쨍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더럽게 더운 날. 언제나처럼 가벼운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비앙키에 올라타 페달을 밟기 시작했을 때는 이제 곧 가을임을 알리듯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햇볕은 뜨거웠지만 그래도 전력으로 달렸던 그날만큼 덥지는 않았다.
인터하이가 끝났다. 오노다쨩이 마나미를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 하코네는 졌다. 단지 그뿐인 이야기였다. 고교 마지막 인터하이가, 오직 1등을 위해 달려왔던 모든 게 끝났다. 조금 더 빨리 달렸더라면, 조금 더 연습했더라면 그런 후회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후쿠쨩에게 원하던 말을 들었고 나는 자전거에서 내렸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하코네를 최상의 위치로 이끌었다. 조금 분하긴 하지만, 내 역할은 거기까지였으니까. 하코네는 약하지 않았다. 다만 오노다쨩이, 소호쿠가 조금 더 강했을 뿐이었다.
부실에 도착하자 트레이닝 중인 이즈미다가 보였다. 녀석은 나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얼굴도 몸도 땀범벅이 된 걸 보면 내가 일어난 것보다도 한참 전에 와서 연습을 시작한 듯했다. 인터하이 이후로 부쩍 늘어난 연습량에 걱정되긴 했지만, 간단한 손짓으로 말을 대신했다. 연습에 집중하고 싶은 거라면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아마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거겠지. 후회가 남고 더 잘하지 못한 자신에게 분노하는 거라 짐작했다. '이즈미다, 무리하지 마.' 연습이 과하다 싶을 때는 신카이가 나서 이즈미다를 말리기도 했기 때문에 부실에서 몇 번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무리하더라도 제 몸 하나 못 챙길 녀석은 아니니까. 나는 그런 녀석을 지나쳤다.
교실 안의 선풍기는 돌아가는 날보다 돌아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성큼 가을이 다가온다는 느낌이었다. 졸업하면 뭐하지. 일단 진학으로 생각하고는 있지만…. 문득 드는 생각에 교실을 둘러보았다. 빈 책상이 드문드문 보였다. 인터하이 후에 운동부에 속한 녀석들이 수업을 빠지는 건 예삿일은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넘겼다. 얼핏 보아도 빈 책상이 조금 많았는데 우리 반에 이렇게 운동부가 많았나 싶었다. 하긴 토도, 신카이에 나만 해도 3명이니까.
토도는 누군가에게 문자를 하는지 휴대폰을 붙잡은 채 재수 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신카이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잘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별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다. 턱을 괸 채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 생활도 곧 끝인가. 영원한 게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나는 여전히 바이크를 타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대로 있어 봤자 변하지 않는 건 재미도 없고. 추천 입학을 하면 대학교에 진학하는 건 무난하다고 했다. 그것도 성적이 밑바닥이라 받아 주는 곳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이었지만, 로드를 탈 수만 있고 원하는 과가 있다면 어딜 가든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후쿠쨩도 여기저기서 추천이 들어오는 모양이고, 신카이도 갈 곳 정도는 제대로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토도는 진학하지 않는다 했으니 잘 모르겠지만, 하코네 녀석들은 뭐가 되든 될 놈이라고 생각했기에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건 꽤나 큰 착각이었다.
인터하이가 끝나고 2주를 넘어가던 그날, 이즈미다는 병원에 입원했다. 사유는 근육파열이었다. 뭐 그런 걸로 입원을 하고 그래. 하루 늦게 소식을 들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어제 병원에 다녀온 토도는 한 번 다녀오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항상 웃기만 하던 얼굴이 꽤 심각한 낯을 하고 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병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카이와 함께 병실에 들어서서야 나는 토도의 표정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미세 파열 정도로 짐작했던 이즈미다는 몸 곳곳에 반깁스를 한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부분 파열을 넘어 완전 파열이라고 했다. ‘이 정도면 통증을 못 느끼진 않았을 텐데 왜 이제야 왔냐고 의사에게 욕을 먹었다’며 이즈미다는 웃었다. 내년에는 하코네에게 꼭 왕자의 이름을 가져올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 당장 일어나서 연습하고 싶다고 했다. 녀석은 누워서도 머릿속에 인터하이 생각밖에 없는 것 같았다. 왕자의 이름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선 그 정도 기백은 있어야지.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뒤통수를 한 대 치며 얼른 나으라고 욕을 퍼부었다.
이즈미다는 2주 후 퇴원했다. 퇴원이 빠른 편이었기에 후쿠쨩은 완전히 다 나을 때까지 이즈미다의 부 활동을 금지했다. 하지만 이즈미다는 그만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재입원했다는 황당한 소식에 다시 돼지와 함께 녀석을 찾아갔다. 그때 이즈미다의 혈색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얼굴은 불안한 빛을 띠고 있었고 항상 열의에 넘치던 눈동자는 그 빛을 잃은 듯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의 그 눈빛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즈미다의 손은 아령을 쥐고 있었다. 잠시라도 트레이닝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는 얼굴이었다. 신카이는 너도 참 대단하다며 이즈미다의 손에서 아령을 뺏으려 했지만 이즈미다는 그런 신카이의 손을 매몰차게 쳐 냈다. 이즈미다가 신카이에게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처음이라 본인 역시 당황했는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던 이즈미다가 곧 입을 열었다.
“선배… 저 무서워요.”
무슨 개소리냐고 물으려 했으나 신카이는 나를 막아 그가 계속 이야기를 하게 만들었다.
“저도 아는데. 그만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계속 몸이 움직여요. 퇴원했을 때도 그랬어요. 정신 차리면 자전거에 타고 있더라구요. 분명히 아픈데. 이 이상 하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멈추질 못하겠어요.”
이 새끼가 미쳤나.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 반응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 더 움직였다간 너 영영 로드고 뭐고 아무것도 못할 수도 있어. 알아? 병실이 떠나가도록 소리치자 신카이가 나를 말렸다. 돼지 새끼는 나를 먼저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 아무래도 방해가 되니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뜻이었다.
병실 밖의 의자에 앉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싸한 소독약 냄새와 함께 눈에 들어오는 하얀 간호복이 역겨웠다. 병원은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이 태어나는 한편 죽어나는 장소. 이 시대에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인지도 모른다. 이런 곳에 누워 있으니 이즈미다의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도 당연하지. 집에서 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는데. 어느새 옆에 다가온 이즈미다의 부모님이 내게 말을 걸었다.
“미안해요, 문병까지 와 줬는데. 토이치로가 많이 불안해해서 학교 친구들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까 잠깐 이야기하는 것 같던데…. 아무리 말려도 듣질 않아요. 팔 안쪽에서 혈관이 터질 정도로 운동하면서도 멈추질 않아요. 병원 측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다면서….”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 채 이야기하는 아줌마의 얼굴에 이대로 가다간 이즈미다보다도 아줌마가 먼저 죽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병원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얼핏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그와 동시에 이즈미다는 퇴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이즈미다의 입원을 전후로 부를 탈퇴하는 사람이 늘었다. 근육이 완전히 파열될 만큼 운동을 한 이즈미다가 특수한 경우였는데 그 사건을 계기로 으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후쿠쨩은 가는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 ‘애도 아니고 그 정도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지 않나. 다음 인터하이 때 왕자를 탈환할 근성 있는 녀석이라면 아직 많다’고 답한 게 전부였다. 그나마 애들과 사이가 좋은 신카이가 이유를 물었는데 탈퇴 사유는 다 제각각이었다. ‘자전거가 재미없어졌다’, ‘다른 부 활동을 하고 싶다’, ‘부 활동할 시간이 없어졌다’, ‘학업에 집중하고 싶다’ 등등. 내 예상과는 달랐기에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후쿠쨩 말대로다. 남을 놈은 남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결국엔 우승할 거다. 이번에 못했다면 내년에는 더더욱 왕자를 되찾아야만 하니까.
밥상에 앉아 수저를 들었을 때도 언제나와 같은 저녁이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는 최근 묻지 마 살인사건이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요즘 들어 저런 뉴스가 하도 많이 나와서인지 뉴스를 보는 가족들의 반응도 시큰둥했다. 엄마가 ‘세상에’ 하는 소리를 내긴 했지만, 살인사건이 일어나든 말든 우리 가족과는 인연이 없는 얘기였다. 한순간의 가십거리로 끝날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있으면 비앙키를 조금이라도 더 타는 게 낫지.
“너희들도 조심해. 집에 일찍일찍 다니고.”
걱정하는 엄마의 말에 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젓가락을 든 손을 몇 번 흔들던 녀석은 꿀꺽 밥을 삼킨 뒤 말을 꺼냈다.
“외국에서도 살인 사건도 많이 일어난데. 진짜 무슨 일 나는 거 아냐?”
“아, 그러고 보니 요새 학교 안 오는 애들 많아지지 않았어?”
“맞아. 부활 그만두는 애들도 많구.”
“우리도 그런데. 오빠네는?”
빈자리가 몇 개 있긴 했지만, 무슨 사정이 있든 나와는 상관없는 녀석들이었다.
“몰라. 관심 없어.”
“집안 사정이라고 하던데. 부럽다. 나도 학교 가기 싫어.”
“친척이라도 돌아가셨나 보지. 그보다 너 저번 시험 성적 떨어졌잖아.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 또 잔소리! 엄마 밥 먹을 때는 밥만 먹어. 밥만.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데.”
“이 지지배가? 뭔 말만 하면 잔소리래.”
저녁때 엄마와 동생이 식탁을 마주한 채 한판 하긴 했지만 늘 있는 일이었다. 그저 언제나처럼 일어나 학교에 가고 비앙키에 타고 부 활동이 끝나면 집에 돌아오는 더없이 평범한 날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때부터 일은 시작되어 있었다.
다음날 학교에 갔을 때는 날벼락이 떨어져 있었다.
“야스토모!”
헐레벌떡 교실문을 열어젖힌 돼지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 진파치를 불렀다. 토도 역시 갑자기 이름을 불려 눈을 크게 뜨고 신카이를 보고 있었다. 그는 토도와 내 시선이 저를 향한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주이치… 주이치가….”
신카이는 손에 쥔 편지를 내밀었다. 나는 신카이에게서 편지를 뺏어들고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하얀 편지지에 검은 펜으로 적힌 글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아라키타, 신카이, 토도에게.
말도 없이 떠나게 되어 미안하다. 정말로 너희에게 면목이 없어.
하지만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안 될 일이기에 이렇게라도 인사를 남긴다. 나는 프랑스에 가기로 했다.
급하게 가게 되어 아직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다.
도착하면 다시 연락하도록 하지.
p.s 너희도 너희가 원하는 길을 가길 바란다.
편지에 적힌 것은 이게 전부였다. 용건만 간단히. 참 후쿠쨩다운 편지였다.
“프랑스에 갔다고?”
“후쿠가 부도 내팽개치고 갈 리가 없잖아.”
“몰라. 편지 받은 게 전부야. 연락도 없었고 급하게 간 거라 나도 뭐가 뭔지….”
“이건 뭐야? 원하는 길을 가라는 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후쿠쨩이라면 대학교야 어디든 잘 갈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시기에 굳이 프랑스로 떠나다니. 후쿠쨩이 프랑스에 갈 일이라면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뜨루 드 프랑스. 여름에 열리는 경기가 다시 시작하려면 1년이나 남은 셈이다. 그런데 지금 프랑스에 가야 했다고?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다고 했으니 부모님이나 집안과 관련된 사정일지도 모른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머리를 맞대고 있을 때 복도에서 비명이 들렸다. 교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복도에 여자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칼에 찔렸는지 하얀 교복 셔츠가 빨간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흥건하게 새어 나오는 피로 보아 쓰러진 학생은 이미 죽은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른 사람은 그 옆에 있던 여학생이었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해 내는 친구를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범인으로 보이는 남학생 하나가 식칼을 든 채 서 있었다. 남자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과 손에 쥔 칼과 피 그리고 쓰러진 여자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들부들 떨리던 손이 칼을 떨어트렸다.
“아… 아냐, 내가 그런 게 아냐. 나는 그냥 좋아서….”
좋아서? 사귀다 차이기라도 했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람을 죽였다고. 장난이 아니란 말야.
“이… 이게 뭐야.”
당황한 토도가 탄식과 같은 소리를 냈을 때는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녀석의 배에 주먹을 날리며 소리쳤다.
“돼지 새끼! 뭐하냐! 빨리 구급차 불러!”
내 말에 신카이는 급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배에 꽂힌 주먹에 정통으로 맞은 남자는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녀석은 저항하며 내게도 주먹을 날렸으나 이딴 주먹에 당할 만큼 힘이 약하지도 짬이 없지도 않았기에 상대하기는 쉬웠다.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주먹에 저항하는 것 외엔 자리에서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흔들리는 그 눈동자가 어딘가 모르게 이즈미다의 눈과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머지않아 교무실에서 선생이 달려왔고, 창밖에서는 언제 도착했는지 구급차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의 손에 잡힌 녀석은 계속해서 ‘아냐, 내가 한 게 아냐’라는 당치도 않은 변명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