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배구 28

쿠로다이 전력 60분 따듯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하신 분

차갑게 얼어붙은 손이 시렸다. 장갑 너머로도 전해지는 한기에 절로 몸이 떨렸다. 약속까지는 30분 넘게 남아 있었다. ...기대한 것처럼 보이진 않겠지. 코트 아래 챙겨입은 정장은 얼마 전에 새로 산 것이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입자고 넣어뒀는데, 오늘은 나한테 중요한 날이었나?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자리일 텐데. 며칠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잘한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을 감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럼 역 앞 카페에서 만나요. 휴대폰 화면에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에는 귀여운 이모티콘이 붙어있었다. 얼굴을 붉힌 채, 수줍게 웃고 있는 캐릭터. 상대방의 사진을 누르자 프로필이 떴다. 환하게 웃는 얼굴의 여자는 예뻤다. 마르기도 했고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여리여리한 사람이었다. 약간 귀엽기도 하고 키는 ..

글/배구 2018.09.15

쿠로다이 전력 60분 쿠로오는 언제나 핫초코를 주문해

어서 오세요. 바쁜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카페 점원은 밝은 얼굴로 인사 건네기를 잊지 않았다. 메뉴판을 볼 것도 없이 비슷한 메뉴를 주문하는 직장인들로 북적이는데도 계산대 앞의 직원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나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 사이 쿠로오는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신메뉴라며 나온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커피 사진이 보였다. 그래 봤자 늘 같은 거잖아. “핫초코.” “핫초코 하나, 아메리카노 따듯한 거 하나요.” “7,000원입니다.” 카드를 건네며 눈을 맞췄다. 익숙한 얼굴임에도 직원은 예의상 내게 물으려 했다.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 먼저 선수를 쳤다. “영수증은 버려 주세요.” “네. 진동벨로 알려드릴게요.” *** 머그잔 가득히 담긴..

글/배구 2016.12.17

쿠로다이 겨울밤

“회사 상사가 아니라 인생을 오래 산 선배로서 얘기하는 거야. 이러는데. 조언? 조어언~? 누가 그딴 거 해달라고 했습니까 이 자식아? 듣기 싫어하는 거 알면 얘길 하지 말든가!” “지, 진정해. 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한결같은 얼굴이었다. 모두가 어엿한 사회인으로서 일하고 있는 처지였다. 뭐 인생사 누구나 다사다난하고 이것저것 있는 법이지만 꿈꿔왔던 만큼 찬란한 미래도 좌절했던 만큼 암울한 미래도 없었다. 플러스마이너스 제로. 마치 그 법칙을 지키기라도 하듯 인생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법이 드물었다. 잔을 들고 술을 따르고 몇 번을 이어지던 스가의 푸념은 테이블에 녹다운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제 목소리를 내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이상적인지 사회에 나와서야 실감했다. ..

글/배구 2016.12.09

쿠로다이 너의 무게

다이른 다녀오고 너무 뽕 차서 휘갈긴 쿨다이..쿠로다이 행쇼~!!!! 6시 반. 알람이 없어도 번쩍 눈이 떠졌다. 배와 다리 위에 올라와 있는 무거운 팔다리의 무게를 느꼈을 때, 뱃속에서 꾸르륵 소리가 이어졌다. 식욕이 당기거나 배가 고픈 게 아니다. 서둘러 짐 덩이를 치우고 이불 속을 빠져나왔다.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거울에 얼굴이 비쳤다. 여기저기 뻗친 머리가 정신 없었던 엊저녁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상하다. 어제 뭐 먹었지. 변기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회식은 소주에 고기 2차는 치킨에 맥주 3차는 곱창에… 짚이는 이유가 너무 많았다. 고개를 내두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틀었다. 바깥 날씨처럼 차가운 물이다. 으, 추워. 팬티만 걸친 몸으로 이 날씨에 잘도 이러고 ..

글/배구 2016.11.20

쿠로다이 전력 60분 2인1우산

아아… 귀찮다. 슬슬 나가야겠지. 휴대폰을 들고 저지를 걸쳤다. 최근 통화내역에 남은 ♥︎테츠로를 보며 노트북을 덮었다. 이건 또 언제 바꿔 놓은 거야? 웬 하트? 5분 전에 걸려 온 전화에서 대뜸 ‘큰일 났어!!! 다이치!!’라는 말에 깜짝 놀랐는데 한다는 말이 ‘나 우산이 없어서 마중 나와야 할 것 같거든. 올 수 있어?’였다. 그러게 아침에 뉴스에서 비 온다고 말 할 때 제대로 들을 것이지. 기어이 나를 꼭 집 밖으로 불러 낼 셈인 거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10분 거리. 그래도 혼자 걸어오는 것보다는 나랑 같이 돌아오는 게 더 좋다는 거겠지. 비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고 장마를 맞아 주룩주룩 내리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장마 시작한다고 우산 가지고 나가라고 했잖아! 누군가에게 선물 ..

글/배구 2016.07.16

쿠로다이 전력 60분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이어진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한가한 토요일 밤, 식사를 마친 뒤 TV 앞에 앉아 배를 긁을 만한 남자 둘 앞에서 예능 프로그램 출연자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 웃어댔다. 저게 언제 적 대사야? 그가 의문을 제기할 새도 없이 옆사람은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있잖아, 사와무라. 오늘은 저걸로 해 볼까?”“……? 뭘?”“그러니까. 섹스할 때.”너랑 나. 학생이랑 선생으로. 뒤이어지는 부연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는데. 너무나 당연하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그의 모습에 다이치는 조용히 시선을 거뒀다. 미쳤어. 이 자식은 미친 거야. 쇼파에 늘어져 휴일을 즐기는 것으로 충분했는데. 새로이 시작된 헛소리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천장을 봤다. 하얀 불빛에 눈이 부셔 얼굴을 찌푸렸다...

글/배구 2016.05.14

쿠로다이 전력 60분 낙인

추노 + 조선 + 일본(!) 설정입니다. 떡 벌어진 대문으로 들어설 때부터 남자는 이 고을에서 야마모토가 유명세를 떨치는 이유를 짐작했다. 기왓장이 얹힌 집만 다섯 채가 넘었고 노비들이 사는 집도 언뜻 보기에 열 채를 넘는 듯 했다. 거느린 노비가 100명을 웃돈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역시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은 아니란 말이지.야마모토 가. 본디 야마모토 가는 몇 대에 걸친 양반 집안으로 유명했다. 24대 임금 때부터 관직에 올라 2세기가 넘도록 관직에 종사하고 있는 가문이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이제 남은 것은 그 이름뿐으로 유명세가 이제까지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은 타카시가 당주 자리에 오르면서부터였다. 조정에서 받은 공문이 아니었다면 이 집에는 발조차 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글/배구 2015.06.06

하이큐 전력 60분 쿠로다이 벚꽃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했는데, 낮은 따듯했다. 평일 오후, 강변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점심 무렵에는 잠시나마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잠깐의 휴식이 끝난 사람들이 일터로 돌아가 버리자, 강변은 눈에 띄게 한산해졌다. 강을 따라 쭉 늘어선 나무에는 벚꽃이 만발해 있었다. 어쩌다 바람이라도 불면 연분홍의 꽃잎이 아무도 없는 길에 흩날리는 그 풍경은 장관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러한 풍경에도 감흥이 없는 건 순전히 내 마음 탓이었다. 대학교 3학년. 빠른 친구들은 벌써 인턴으로 사회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대다수 친구들은 휴학을 택했다. 유학을 간 사람도 있고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편입을 준비하는 학생도 있었다. 자격증이니 국가고시를 택하는 사람들도 더럿 있는데, 정작 나는 뭘 해야 할지 아무 생..

글/배구 2015.03.28

하이큐 전력 60분 쿠로다이 사탕

한숨이 났다. ‘미안, 10분 정도 늦을 것 같아.’ 휴대폰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싶었더니 출구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 10분째. 사람을 쳐다본다는 건 당사자는 모르게 남을 관찰한다는 느낌이라 좋아하지 않는데, 오늘은 누가 누굴 쳐다봐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갈 만큼 사람이 많았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거의 다가 옆 사람의 손을 잡거나 연인과 팔짱을 끼고 있었다. 더러는 허리나 엉덩이에 손을 얹은 채였다. 양쪽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웅성거리는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잔잔한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정신이 없이 그때그때 추가한 탓에 최근에 정리한 재생목록은 한 락밴드의 노래로 가득했는데 이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자기들 노래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척박한 세상에서 락을 노래..

글/배구 2015.03.14

쿠로다이 First Day 축전

이연님 책 First Day(14.12.27 코믹 발간)에 축전으로 드린 글입니다. After 다이치가 눈을 뜨자 바닥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볼에 닿은 바닥이 뜨거웠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온몸에 휘감긴 이불을 보며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맨바닥에서 머리를 떼자 띵하니 머리가 울렸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뚜둑거리는 소리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어제 분명 침대에서 잤던 것 같은데. 머리를 감싸며 옆을 보자 그를 바닥으로 밀쳐낸 원흉이 보였다. 쿠로오는 다이치의 몫까지 빼앗아 가, 베개 두 개로 머리를 감싼 채 자고 있었다. 아, 저래서 저 녀석 머리가 저 모양인 건가. 기이한 모양새로 서 있다 했는데 잠버릇을 생각하면 이해가 갔다. 엎드린 채로 자는 모습에 그는 한숨을 ..

글/배구 2014.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