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배구

쿠로다이 전력 60분 따듯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하신 분

중독된 깡 2018. 9. 15. 22:58

차갑게 얼어붙은 손이 시렸다. 장갑 너머로도 전해지는 한기에 절로 몸이 떨렸다. 약속까지는 30분 넘게 남아 있었다. ...기대한 것처럼 보이진 않겠지. 코트 아래 챙겨입은 정장은 얼마 전에 새로 산 것이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입자고 넣어뒀는데, 오늘은 나한테 중요한 날이었나?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자리일 텐데. 며칠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잘한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을 감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럼 역 앞 카페에서 만나요.


휴대폰 화면에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에는 귀여운 이모티콘이 붙어있었다. 얼굴을 붉힌 채, 수줍게 웃고 있는 캐릭터. 상대방의 사진을 누르자 프로필이 떴다. 환하게 웃는 얼굴의 여자는 예뻤다. 마르기도 했고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여리여리한 사람이었다. 약간 귀엽기도 하고 키는 160이 안 된다고 했던 것 같다. 옆에 섰을 때 어느 정도가 될지 가늠해 보다가 화면을 넘겼다.


‘소개팅, 해 볼 생각 없냐?’


넉이 나간 듯한 내 눈길에 쿠로오는 제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아는 후배가 괜찮은 사람 없냐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주변에 괜찮은 놈이 너밖에 없더라고.’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쿠로오가 하는 말을 이해할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여자를 소개시켜 주겠다는 거지? 기가 말이 나오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순간 뒷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나는 적어도 우리가 친구 이상이라고 생각했는데. 키스 이전까지 할 건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을 봤다. 항상 술을 마신 후라 그렇지, 스킨십도 잦았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손을 만지거나 어깨나 허리를 더듬는 게 그냥 스킨십을 좋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일이 끝나고 툭하면 술 한잔하자면서 사람을 불러냈다. 됐다고 해도 밥이라도 먹자며 재차 붙잡았다. 쿠로오가 가는 곳은 거의 맛이 괜찮은 집이라 나도 모질게 거절하진 않았다. 그래도 매번 친구라곤 나밖에 없는지 끈질길 만큼 연락하는 게 의아했다. 굳이 술도 잘 못 마시는 나를 불러내는 이유는 뭔데. 생각한 걸 그대로 입 밖에 냈다가 우연히 들었다.


‘몰랐냐? 내가 너 좋아하잖아. 어휴, 눈치가 그렇게 없어서 어떻게 사회생활 하세요? 사와무라 군?’


말을 마친 녀석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또 술잔을 들이키고는 그대로 뻗어버렸다. 좋아하는 사람 없냐,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 물었던 질문들이 스쳐지나갔다. ‘마흔 먹어서도 결혼 안 하면 우리 같이 살까?’ ‘사와무라같이 성실한 사람이면 좋겠네.’ ‘나는 짝사랑 중이거든. 좀... 오래 됐는데. 눈치를 못 채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그냥저냥 흘러들었던 말들이 얽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쿠로오는 나를 좋아한다고. 


다음날, 쿠로오는 기억을 못 하는지, 어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냐며 선수를 쳤다.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아 모르는 척 평소랑 똑같았는데 왜 잠꼬대냐고 되받아쳤다. 혹시나 고백하려나. 쿠로오에게 불려나갈 때마다 그 고백이 생각났다. 오늘 하려나. 아니면 내일? 일주일 뒤? 뭐야? 언제 고백하는 거야? 정말 말할 생각 없는 거야? 계속 짝사랑이라도 하시려고? 설마 그것도 그냥 농담이었나? 그렇게 생각할 무렵에는 나도 쿠로오라면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웃긴다, 다이치. 쿠로오가 좋다고 했다고 너도 그사이에 남자를 좋아하게 된 거야? 자책하며 한숨을 쉬자, 녀석이 물었다. 


‘뭐야, 안 어울리게 웬 한숨? 또 상사가 뭐라 해?’


편한 길을 가자고 마음속으로 어쩌면 안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좋아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면 편하잖아. 새롭게 뭔가 할 필요도 없고. 나 좋다는 사람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그게 제일 행복해지는 길일지도 모르는데. 노후를 함께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꽤 위안이 됐고, 오랫동안 사귀었던 친구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쿠로오 정도면 나쁘지 않고 얼굴 맞대고 있어도 사람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으니까.


그랬는데 소개팅이라니. 소개팅? ... 이 자식은 도대체...? 화가 났지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시켜 줘, 소개팅.’


거기서 역시 화를 냈어야 했나. 괜히 모른 척 넘어가서 벌 받는 거 아냐? 


소개팅 상대는 괜찮았다.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을 때도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라는 티가 났다. 정말 내가 이 사람이랑 잘되기를 바라고 소개시켜 준 걸까. 개팅 자리에 나와서도 쿠로오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내가 이런 좋은 분을 소개받아도 되나? 그전에 나는 쿠로오가 좋다는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휘둘릴 필요가 있는 건가? 그 좋다는 말도 사실 그냥 친구로 좋단 거 아냐. 괜히 혼자 착각하고 이렇게까지 삽질하고 있는 거면....


오히려 정말 잘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마음속으로 계속 쿠로오에게 신경을 쓰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정리되는 게 나을 테니까. 나한테 애인이 생기고, 그로 인해 내 저녁 시간이 사라지게 되면 쿠로오도 더 이상 술 마시자고, 밥 먹자고 날 불러낼 구실은 없어지겠지. 


정말로 잘되면? 쿠로오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던 나는 뭐가 되는 거야? 나는 게이인가? 하지만 굳이 남자를 보고 좋다고 생각한 일은 없는데. 멋있다고 생각한 적이라면 몇 번 있을지 몰라도 그게 연애 대상으로 보인 적이라면 쿠로오가 내게 고백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쿠로오가 내 첫사랑이라도 되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테이블에 엎드렸다.


미쳤네, 정말. 쿠로오랑 같이 놀더니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게 아닐까. 나는 남자를 좋아한 적이 없어. 없다고. 네가 좋아한다고 해서 너 정도면 괜찮을지도라고 생각한 것뿐이라고. 술에 취해서 되도 안되는 말을 지껄인 네가 잘못이라고. 그냥 바로 ‘너 어제 나한테 고백했어’라고 실토할 걸 그랬나? 그랬으면 뭐. ‘친구 좋다는 말이 뭐냐’고 넘기지 않았을까? 아니면 들켰단 생각에 얼굴이라도 붉혔을까? 괜히 진짜 좋은 친구라는 말에 설레발친 거 아냐? 그럼 지금까지 내가 했던 고민은 뭐가 되는 거야? 이런 걸 왜 지금 고민하고 있어야 하냐고!!


“…분? 따듯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하신 분?”


머릿속이 가득 차 있을 때 점점 더 언성이 높아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었단 사실이 떠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근데 방금 따듯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안 했나. 내가 그렇게 주문했나? 픽업대로 가자, 한참을 부른 듯 카페 직원이 눈을 흘기며 웃었다. ...그런가 보다. 따듯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맛있게 드시란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려 있어 나는 눈도 못 마주친 채, 컵만 들고 걸었다.


주문이 어떻게 들어갔는지 머릿속에도 안 들어왔던 게 분명했다. 주문과 다르게 따듯하기만 한 아메리카노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가다 문득 내가 너무 초라해졌다. 주말에는 입지도 않는 정장인데 잘 보이자고 옷을 차려 입었다. 아니, 보란 듯이 잘 보여서 쿠로오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오늘 처음으로 개시한 새 정장이었다. 주말에 사람 많은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데, 번화가 근처로 약속까지 잡았다. 거기에 미리 와서 기다리는 게 예의라고 30분이나 일찍 와서는,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자리에 앉아 음료를 손에 쥐었다. 따듯한 온기가 손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한 모금을 마시고 나는 눈을 감았다. 일단 진정해, 진정하자, 사와무라. 쿠로오는 정말 좋은 의도로 소개해줬을지도 모른다고. 좋게 생각하려 마음을 먹어도 반대쪽에선 다시 들고 일어났다. 좋은 의도는 개뿔. 그냥 가능성이 있나 없나를 본 거 아냐. 마침 정말 후배한테 소개팅 부탁이 들어와서 날 떠보려고 한 거라고. 생각할수록 복잡해지기만 했다. 


문득 손목에 손을 댔더니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꽤나 크게 느껴졌다. 지금 이 두근거림은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두근거림일까, 아니면 쿠로오에 대한 분노일까. 단순히 카페인이 들어갔기 때문일지도. 어느 쪽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 더 화가 났다. 


애써 숨을 고르며 심호흡을 했다. 일단 소개팅이 어떻게 되든 그 자식, 만나면 한 대 때려주는 걸로 시작하자. 어느새 손에는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